“1969年 KAL기 납치피해자 황원씨 평양 부근에 생존”

“유골이 된 아버지를 만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 치도 없다. 살아있는 아버지의 체취와 체온을 느끼고 싶다”


14년째 아버지의 송환을 위해 지난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황인철(47·사진) ‘KAL기 납치 피해자 가족회’ 대표의 심정이다. 누구의 도움 없이 홀로 14년 동안 송환 운동을 벌여온 황 대표는 대화조차 통하지 않는 북한과 비협조적인 정부를 보면서 중과부적의 한계를 느끼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아버지를 떠올렸다. 40여 년간 북한 당국의 감시와 차별을 받고 있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가 느끼는 한계는 한갓 핑계에 불과했다. 


황 대표는 처음 송환 운동을 시작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저희 아버지 생사확인을 시작한 결정적 계기는 2001년 제3차 이산가족상봉에서 남한에 있는 어머니 이후덕 씨가 아버지와 함께 납치된 스튜어디스 성경희 씨를 만나는 것을 보면서 나도 아버지를 만나야겠다고 결심했다”고 소회했다.     


황 씨의 아버지 황원(납북 당시 32세) 씨는 1969년 12월 대한항공 KAL YS-11기를 타고 강릉에서 김포로 비행하던 중 북한 고정간첩 조창희에 의해 피랍됐다. 당시 비행기에는 황 씨 아버지와 함께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이 있었다. 납북 66일 만인 그 다음 해 북한은 유엔과 국제사회의 여론을 의식해 39명만 돌려보냈고, 나머지 11명은 지금까지 돌려보내지 않고 있다.


황 씨는 현재까지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송환운동을 벌이고 있다. 기자회견을 하건 KAL기 납치자 송환을 위한 사진전을 하건, 정부 당국자를 만나건 그는 항상 혼자였다. 초반에는 돌아오지 않는 11명의 가족들이 동참하기도 했지만 너무 오래전의 사건이며, 가족들도 고령이라 적극적인 송환운동 참여가 녹록지 않았다.


특히 황 대표는 초기에 여타의 납북자가족모임에 합류해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KAL기 납치피해자들은 다른 납북자 이슈에 묻혀 정부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지게 된다. 결국 황 대표는 혼자하기로 결심한다.


황 씨를 힘들게 하는 것은 외로움뿐만이 아니었다. 세 딸을 둔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회사 일을 해도 돈을 벌기 힘든 상황이고 다들 근근이 살고 있는데, 버는 것은 거의 없고 지출만 해야 한다는 게 정말 공포스럽다. 어떤 때는 버스를 타야 하는데 버스비가 없어서 그냥 몰래 타기도 했다.” 


그런 그를 보며 황 대표의 부인이 “당신이 하는 일, 백 번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애들도 돌봐야 하지 않겠냐”고 말할 땐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다.


황 대표가 송환 운동을 시작할 때 3살 이었던 큰 딸은 벌써 중3이 됐다. 큰 딸은 내년에 반장 선거에 나갈 예정이라고 한다. 딸아이를 위해 해준 게 없어서 늘 미안하다고 말할 때면 큰 딸아이는 오히려 “아빠는 할아버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잖아”라고 위로한다. 황 대표에게 가족은 가장 든든한 지지자이며 후원자다.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이러한 가족의 응원과 지원으로 힘을 내게 됐다. 황 대표는 사비를 털어 국제사회에 북한의 강제적·비자발적 납치 만행에 대해 알리고 국제적 관심을 이끌어 내는 데 기여했다. 2010년 6월 17일 유엔인권이사회 산하 유엔 강제적·비자발적 실무팀에 아버지 황철 씨의 납치 사건을 처음 접수했고, 2012년 10월에도 유엔인권이사회 북한인권 담당관들에게 북한인권 문제를 알렸다. 또 영국 의회 의원들과 프랑스 외교부 고위 외교관들을 만나 납북자 문제를 논의했다. 


그는 “국제사회에서 하이제킹(hijacking)은 문명사회에서 발생할 수 없는 만행이고 테러라면서 한국과 북한만의 문제가 아니고 전 세계적인 문제”라며 “하이제킹 문제는 어느 나라에서 발생했든 해결됐다. 그런데 유독 KAL기 문제가 미해결로 남아있다. 기필코 해결해야 할 문제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정부의 무관심에 대해 일갈했다. 그는 “나는 송환운동을 오랫동안 벌이면서 정부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관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느꼈다. 정부하고 무엇을 하자고 하면 번번이 펑크가 생겼다. 영국 청문회에 갈 때 정부 요구대로 두 명으로 한정해서 갔는데도 체류비용은 자부담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북한이 2006년에 대한적십자를 통해 생사확인 불가라는 통지문을 남한에 보내왔다. 살아 있다는 것인지, 죽었다는 건지, 정부가 요구를 다시 요구를 해야죠. 이산가족으로 분류해 놓고 어떤 대처가 없더라”면서 “2012년 3월 북한은 UN인권이사회 강제실종 실무그룹에 ‘정치공세’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정부가 더 강력하게 생사확인을 요구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최근 황 씨는 아버님 황원(76세) 씨 생사문제와 관련 자세하게 밝힐 수 없다면서도 평양에서 수십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대북 조력자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밝혔다. 때문에 황 대표는 최근 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정부의 무관심은 여전하다.


끝으로 그는 한국 정부와 북한 당국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정부는 정신 바짝 차리고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고 북한의 무성의한 답변에 반박을 해야 한다. 국제사회를 통해서라도 북한에 요구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북한당국에는 “부인한다고 해결 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전 세계가 다 아는 납치문제다.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겠다는데,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 생사확인을 해달라는데 못 해줄 이유가 어디 있냐고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