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25일 춘천 2연대는 무너지지 않았다

1950년 6월 중하순 중동부전선의 강원도 춘천과 홍천. 이곳 북방에 배치돼 있던 국군 제6사단은 전차 1개 연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2사단과 제7사단의 공격을 받는다. 춘천, 어론리, 현리, 말고개 일대에서 치러진 ‘춘천·홍천지구전투’(1950.6.25∼30)는 이 공격에 대항한 방어 전투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전면적인 불법남침을 도발했을 당시, 임부택( 林富澤) 중령은 국군 제6사단 7연대장이었다. 춘천 정면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1949년 12월 19일 제7연대장에 부임한 임 중령은 부대 교육훈련과 38선 방어진지 구축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제7연대는 북한군이 남침하기 이전 대대 전투훈련을 완료한 바 있다.


춘천이 38도선에서 불과 13㎞ 남쪽에 위치한 사실을 감안해 처음에는 38선 주요 접근로에 토치카 및 유개호를 구축하고 기성진지를 보수했다. 그러나 48㎞의 광범위한 정면을 모두 지킨다는 것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춘천을 고수할 수 있는 주저항선에는 진지가 없었다.


이에  임 중령은 춘천 주민과 학도호국단의 지원을 받아 방어에 유리한 소양강변과 그 북쪽에 춘천 분지를 감제하는 164고지 일대에 방어진지 구축작업을 시작했다.


1950년 6월 25일 04시경. 38도선 전면에 걸쳐서 남침이 개시됐다. 북한군 제2사단과 제7사단은 국군 제6사단 7연대와 제2연대가 담당하고 있던 춘천 북방과 인제 남방지역을 동시에 공격해왔다. 적 제2사단은 제7연대 지역을 정면으로 공격하면서 일부 병력을 북한강 계곡으로 침투시켜 제7연대의 퇴로를 차단해 이를 춘천 북방에서 섬멸시키려 했다.









▲1949년 7월 춘천에서 국방장관과 미 군사고문단의 사열을 받기 위해 정열한 국군 병사들


이에 제7연대장 임 중령은 북한강 계곡의 제3대대와 소양강 북방의 제2대대에 각각 현 진지를 고수토록 지시했다. 포병은 춘천 북방 산발리와 수리봉에 저지사격을 지향토록 지시하였다. 이후 통신이 두절되자 자신이 직접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소양강 건너 우두산에 연대관측소를 추진했다. 그리곤 예비인 제1대대를 북한강 계곡에 투입했다.


연대장의 효과적인 지휘로 제7연대는 병력과 장비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형의 이점을 이용하여 적의 집요한 공격을 격퇴시켰다. 진지를 고수했고, 포병은 화력을 집중해 남진하는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특히 6월 25일 14시경 춘천 북방 옥산포에서 방어하고 있던 제7연대 57㎜ 대전차포 제2소대장 심일(沈鎰) 소위는 57㎜ 대전차포로서는 적의 전차나 자주포를 파괴할 수 없음을 알고 특공조를 조직했다. 화염병과 수류탄으로 SU-76 자주포 2대를 파괴함으로써 뒤따르던 8대를 북쪽으로 도주하게 했다.


제7연대 장병들의 피나는 저항으로 개전 당일 춘천을 점령하려던 북한군의 기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제7연대 장병의 용전분투로 적 제2사단의 춘천공격이 부진하자 적 제2군단장은 제7사단 주력을 인제 방면으로 전환하여 소양강 북안을 따라 춘천의 동측방 공격에 가담시키려 했다.


제7연대는 병력이 부족한 상태에서도 선전분투했다. 그러나 더 이상 전선유지가 불가능하자 육본의 전선조정 명령에 따라 춘천 남쪽 원창고개에 제2대대를 배치하여 철수를 엄호토록 하고 홍천으로 철수했다.


원창고개는 종격실의 고지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방어에 매우 유리한 지형이었다. 그러나 제7연대 2대대는 6월 28일 오후, 적 2개 연대 병력의 침공을 격퇴했으나 6월 29일 결국 고개를 포기하고 홍천으로 철수했다.


이 전투는 6.25전쟁의 승패결정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북한군 제2군단은 서울 공격의 조공부대로서, 6월 25일 당일에 춘천을 점령해 즉각 수원 방면으로 돌진시켜, 서울 방어를 위해 집중될 국군의 증원부대를 차단함과 동시에 한강 이북의 아군을 포위, 섬멸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만일 적의 계획이 성공했더라면 유엔군이 참전하기 이전에 부산을 점령당할 확률이 높았다.


제7연대의 성공적인 방어는 수도권에 집중적으로 투입된 국군 주력부대로 하여금 전열을 재정비하게 하여 한강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갖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 후 제7연대는 전선의 균형유지를 위해 축차 지연전에 들어가 음성 북방의 동락리에서 이천-장호원-충주 축선을 따라 남진중인 적 제15사단 48연대를 기습해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고 격퇴했다. 개전 이래 가장 통쾌한 국군의 승리를 가져왔으며, 부대원 전원이 일계급 특진하는 유례가 드문 대승을 기록하기도 했다.


9월 15일부터 제7연대는 군위, 의성, 안동, 점촌을 수복했다. 문경, 충주, 원주를 탈환해 북진을 계속했다. 10월 4일에는 화천을 점령했다. 이어 평강을 탈환한 연대는 험준한 낭림산맥을 이용하여 완강히 저항하는 적을 섬멸시켰다.


성천, 순천, 개천, 희천을 점령하는 등 북진을 거듭했다. 초산지구를 점령하라는 유엔군사령부의 명령을 받은 연대는 풍장과 고장을 거쳐 10월 26일 초산의 압록강 변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합창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급변했다. 사단으로부터 철수명령을 받은 제7연대는 10월 30일, 압록강을 뒤로 하고 철수의 길에 올랐다. 38도선 이남의 경기도 광주-여주선까지 후퇴했다.


1951년 4월, 제6사단 부사단장으로 명령을 받은 임 대령은 사창리전투에서 중공군 2개 사단의 인해전술로 인해 용문산까지 후퇴하여 방어선을 구축했다.


제2차 춘계공세를 통해 가평을 점령한 중공군 제63군 예하의 3개 사단은 제3차 춘계공세를 개시하여 제6사단을 공격해왔다. 전 화력을 총동원한 협조된 탄막과 항공지원, 역습 등으로 적을 격멸하고 반격을 개시한 제6사단은 3,500여 명의 포로와 2만 명 이상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고 사창리전투에서의 실추된 명예를 되살렸다.


임부택 연대장은 6.25전쟁 3년의 기간 중 육군보병학교 부교장으로 있던 3개월을 제외하고는 전 기간을 연대장, 부사단장, 사단장으로 전장을 누빈 장군이었다. 그는 중공군 총사령관 팽덕회가 ‘임부택을 사로잡거나 제7연대를 없애버리라’는 특별지시를 내릴 정도로 탁월한 지휘력과 용맹성을 발휘했다. 두 차례의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은 6.25전쟁의 명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