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최근 수령독재 체제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는 ‘당의 유일사상체계확립을 위한 10대원칙(이하 10대 원칙)’을 수정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북한 현대사에서 10대 원칙이 갖는 의미가 새로운 관심을 끌고 있다.
10대 원칙은 1974년 4월 14일 김일성의 62회 생일 전날 “전당과 온 사회에 유일사상체계를 더욱 튼튼히 세우자”라는 문헌을 통해 공표됐다. 김정일은 1970년대 삼촌인 김영주와의 후계 경쟁 과정에서 김일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당의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한다는 명목으로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직접 주도했다.
10대 원칙은 김일성 유일독재에 정당성을 불어넣기 위한 사상 선전 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공식적으로는 김정일 명의로 발표되었지만, 입안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김일성이 직접 지휘했다는 설(說)과 김정일이 주도하고 김일성이 묵인했다는 설, 김일성의 묵인아래 김영주가 주도하다가 중간에 김정일이 후계 경쟁을 하면서 이를 가로챘다는 설 등 다양한 추측이 나온 바 있다.
고(故)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생전에 “김정일이가 아버지(김일성)와 삼촌(김영주) 사이를 왔다 갔다가 하면서 눈치껏 10대 원칙을 만들었고, 결국 김일성이 승인한 것으로 안다”고 말하기도 했다.
북한에서 발간한 철학사전은 10대 원칙과 관련 “전당과 전체 인민이 자기 수령의 혁명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수령의 두리에 굳게 뭉치며 수령의 유일적 영도 밑에 혁명투쟁과 건설투쟁을 수행해 나가도록 하는 사상체계”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10대 원칙을 사상체계로 보는 것은 무리가 많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통치자의 의도가 극단적으로 반영된 일종의 ‘행동지침’일 뿐 사상체계로서 갖추어야 할 철학적 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전체 10개 원칙은 사회주의 논리로만 보더라도 그 논거가 취약하며, 일부는 과거 전제주의 왕정시대에도 상상하기 힘든 일상생활의 사소한 부분까지 규정하고 있다. 중복되는 내용도 다반사다.
10대 원칙은 북한이 ‘사회주의 국가’에서 ‘1인 독재국가’로 변질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사회주의 이념, 노동당 규약, 헌법 등을 뛰어 넘어 북한사회 개개인에 대한 핵심 통제기준으로 ‘수령에 대한 충성’을 통치규범으로 제시한 것이다.
10대 원칙은 노동당이 주민들을 통제하고 장악하는 실제 통제수단 역할을 해왔다.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죽을 때까지 그 내용을 암기해야 하고, 학교, 직장, 가정에서 검열을 받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10대 원칙은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한 북한의 사회주의 시스템 붕괴와 주민 인권 탄압의 핵심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북한은 1960, 70년대 유일체제 확립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서 정치·사상사업 우선하고 경제·국방건설 병진 노선과 속도전을 비롯한 하향식 대중동원 등을 무리하게 추진함으로써 체제 발전에 필요한 창의력과 사회적 잠재력을 모두 탕진했다는 것이다.
김영환 (사)시대정신 편집위원은 데일리NK에 “1960년대 초까지 북한의 산업은 나름 대로 과학적이었지만, 10대 원칙이 사람들의 일상 생활이나 산업, 지식활동의 창조성을 억압하고 비자주적인 사고를 갖도록 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한 대북전문가는 “10대 원칙의 모든 내용이 ‘수령에 충성을 다하라’는 것이기 때문에 대외·대내 정책 입안자나 결정자들이 실질적인 경제성장이나, 인민생활 향상을 위한 정책을 내지 못하고, 최고지도자를 향한 충성경쟁에만 허우적거리다 체제가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새로운 10대 원칙이 김정은식 개혁의 발목을 잡는 자충수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제기한다.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신격화(神格化)가 심각해질수록 오히려 김정은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더 약화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