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년 엔타이 북송모녀, 연길서 구원요청

▲ 중국공안에 체포된 탈북자들

2003년 1월 29일 한국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대규모 재중(在中) 탈북자 체포사건이 있었다.

중국 산둥성 엔타이 작은 부두에서 무려 80명의 탈북자들이 작은 배를 빌려 한국행을 시도하다 사전에 중국 공안에 체포된 사건이다. 엔타이는 최근 한국의 국제학교에 진입한 탈북자들을 중국 공안이 체포, 전원 북송된 사건이 발생한 지역이다.

이 사건에서 40여명이 체포되어 북송됐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져 행방불명됐다. 또 이중 극소수는 2003년~2005년까지 한국에 오는 데 성공했다.

이후 이 사건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그러나 당시 북송되어 모진 고초를 겪은 두 모녀가 2004년 재탈출에 성공, 현재 중국에 머물며 한국행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13살 어린 소녀 ‘옥주 모녀’가 그 주인공이다.

DailyNK는 3일 ‘옥주 모녀’와 접촉하는데 성공했다. 옥주 모녀는 현재 중국 옌지(延吉)에 머물고 있다.

– 처음 탈북한 것이 언제였나?

나와 어머니가 두만강을 건넌 것은 99년이다. 우리와 함께 탈북한 6명은 신변 위험을 느껴 “중국에서 자리잡으면 서로 연락하자”며 뿔뿔이 헤어졌다. 나와 어머니는 중국 왕칭 십리평(十里坪)에서 중국사람의 농사일을 도와주며 살고 있었다.

첫해 농사해서 번 돈으로 나는 18원짜리 라디오를 먼저 샀다. 밤 늦게까지 머리맡에 놓고 라디오를 들으면서 한국에 간 탈북자들이 방송에 나와 말하는 목소리가 제일 부러웠다. 나도 한국에 가서 더 배우고 싶었고, 다른 애들처럼 친구도 사귀고 싶었다.

– 한국행을 시도하다 체포된 과정을 말해달라

2003년 어느 날, 함께 탈북했던 사람이 뜻밖에 밤에 찾아왔다. 한국에 가는 길을 알고 있으니, 준비하라고 했다. 꿈속에도 가고 싶었던 한국으로 가는 길이 너무 쉽게 찾아왔지만, 너무나 기뻐 그날은 한잠도 자지 못했다. 심양-대련행 기차를 타고 대련항에 도착했다. 부두에서 신분증 없이도 표를 팔아 우리는 쉽게 배에 오를 수 있었다.

배를 하루밤 탔을까, 산둥성 엔타이 항에 내리려는데 무장한 중국공안들이 내리는 사람들의 신분증을 검열하고 있었다. 신분증이 없는 나와 어머니, 안내자는 꼼짝 못하고 엔타이 공안국 구류소에 끌려가게 되었다. 거기에는 우리와 같은 북한사람들이 많이 붙잡혀 있었다.

그들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함께 배를 타고 한국으로 가려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20일 동안은 엔타이 감옥에, 한달 가량은 단둥 감옥에 잡혀있다가 북한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공안당국은 항상 밤에만 우리를 호송했다.

– 북한으로 어떻게 끌려갔나?

40명이 넘는 탈북자들과 함께 압록강 철교를 건너 신의주로 호송되었다. 무서웠다. 엄마는 내 손을 꼭 잡고 “절대로 한국에 가려고 했다고 하지 말아. 그러면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 둘 다 죽는다”고 말했다.

조-중 국경 철다리를 넘어서자 북한 보위부에서 큰 차를 가지고 나와 있었다. 공안 책임자는 우리들 한 사람씩 이름을 부르며 명단과 함께 북한 보위부에 넘겨주었고, 보위부 차에 옮겨 실려졌다.

– 보위부인가, 아니면 보안서인가?

감옥은 남신의주에 있었는데,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북한에서는 간수들을 ‘선생님’이라고 하는데, 모두 안전원복을 입고 있었다. 감옥은 모두 16개의 방이 있었는데, 남자 칸 10개와 여자 칸 6개였다.

– 고문을 받았나?

남자들은 심하게 때렸는데, 여자들은 잘 때리지 않았다. 한국행 시도를 부인하는 남자들을 취조실에서 ‘악 악’ 비명소리가 나도록 두들겨 패는 소리가 들렸다. 간수들은 자기 손으로 직접 때리지 않고, 감방안의 죄수들끼리 서로 때리도록 했다.

우리 칸에는 30살 되어 보이는 여자 간수 2명이 들어왔다. 먼저 “임신한 사람은 없는가”를 물어보고 몸에 지닌 돈과 물건을 다 내놓으라고 명령했다. 중국공안에게 다 뺏기고 없다고 하자, “옷 벗어! 손 올려! 뽐프 300개!”라고 호령했다.

‘뽐프”라는 것은 손을 머리에 올리고 앉았다, 일어섰다 하는 기압이다. 이런 기압을 주는 것은 알몸 속에 감춘 돈이나 금(金)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중국에서 잡혀 나오는 사람들이 많아 고문방식도 발전했다.

우리는 가지고 있던 돈을 중국공안에 다 뺏겨 없었는데, 청진이 고향인 한 언니는 인민폐를 돌돌 말아 삼켰다가, 매일 검사 들어오는 간수들에게 다 뺏기고 말았다. 간수들은 똥을 막대기로 휘저어 찾아내곤 했다.

중국감옥에서는 그나마 밀가루 빵에 멀건 죽을 먹었지만, 신의주 감옥에서 주는 퉁퉁 불은 통강냉이는 먹을 수 없었다. 내가 못 먹겠다고 하자 “나라를 배반한 놈들은 안 먹어도 돼, 중국 살점을 빼야 제대로 불어”라며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밤이면 이와 벼룩이 기어 나와 잘 수가 없었다. 변소칸에서는 물이 내리지 않아 며칠째 썩은 똥 냄새가 코를 찔렀다.

–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았는가?

나는 어머니와 약속한대로 죽어도 한국에 가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렇게 되어 한 달만에 호송하러 온 온성군 안전원들을 따라 온성군 감옥으로 호송됐다. 우리가 먼저 떠나고, 정치범 수용소로 갈 사람들은 거기에 남았다. 그 사람들 중에 추흥국이라는 사람은 주모자로 총살되었고, 대부분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때 남은 사람들이 나왔다는 소식을 아직까지 듣지 못했다.

– 2차 탈북은 언제 했는가?

온성감옥에서 파라티푸스에 걸려 엄마와 나는 죽을 뻔했다. 감옥에서 징역 3년 판결을 받고 다시는 중국에 가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야 병 보석으로 풀려났다. 집에 가니 우리 집에는 다른 사람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 우리가 나가 굶어 죽은 줄 알고 아버지 직장에서 집을 회수해 다른 사람에게 배정한 것이었다.

농장창고에 자리잡은 엄마와 나를 마을 보안원이 매일 찾아와 감시했다. 약도 없고, 감시도 당하고 치욕스러워 거기서는 도저히 못 살 것 같았다. 나와 엄마는 “죽어도 중국에 가서 죽자”며 그날 저녁 아픈 몸을 끌고 두만강을 다시 넘었다.

‘옥주 모녀’는 지금 한국으로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꼭 한국으로 가고 싶은가?”라는 물음에 모녀는 “죽더라도 한국에서 죽고싶다”며 “북에 가면 어차피 죽고, 여기서는 짐승 취급”이라고 했다.

중국 옌지(延吉)= 김영진 기자hyj@dailynk.com
한영진 기자(평양 출신 2002년 입국) hyj@dailyn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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