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청진 주민 K씨의 방송듣기

▲김일성 생가에서 전금진(아태 부위원장)과 김원웅.

최근 국회에는 상반되는 법률안과 결의안이 두 건 제출됐다. 하나는 한나라당 황진하 의원이 대표발의한 ‘북한주민의 인도적 지원 및 인권증진에 관한 법률안’이고, 다른 하나는 열린우리당 김원웅, 민주노동당 이영순 등 국회의원 23명이 제출한 ‘북한인권문제를 내세운 강대국의 대북강권외교압력 반대 결의안’이다.

전자는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하는 원칙과 방도, 절차에 대해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북한인권개선을 위해 한국 정부가 하여야 할 일에 대해 명시하고 있다. 후자는 미국과 일본이 북한인권문제를 내세워 외교적 압력을 행사하는 것에 반대하고, 경제봉쇄에 반대하며, 북한인권문제는 식량난 해소 등 생존권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공화당 때는 공화당에, 민정당 때는 민정당에, 운동권 정권 때는 또 거기에 달라붙었던 김원웅 의원 같은 사람은 제외하고, 후자 ‘결의안’을 제출한 국회의원들은 대개 과거 학생운동이나 재야운동을 했던 사람들이다.

舊운동권 국회의원들, 옛날 생각 왜 못하나?

70, 80년대에 그들이 ‘운동’을 하고 있을 때, 국제기구나 외국에서 한국의 인권개선을 촉구하는 결의안이나 법률안이 제출되었다면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이건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이니까 너희는 가만히 좀 있어줘”라고 했을까, 아니면 “너희들이 그럴수록 정권의 탄압만 거세지니까 제발 건드리지 말아줘”라고 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지금 한국은 먹고 사는 문제가 급하지 인권 운운할 때가 아니니 간섭하지 말라”고 했을까? 최근 북한인권문제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를 보면 위 세가지 가운데 하나에 해당했을 법하다.

나아가, 국제기구나 외국에서 한국의 인권개선을 촉구하는 결의안이나 법률안을 제출하려고 하니까 어떤 세력이 거기에 반대하는 성명이나 결의를 했다면, 그 세력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필자엔 보기엔 ‘한국의 독재정권에 협력하는 자들’인데, 이번에 결의안을 제출한 국회의원들은 과거 운동권 시절 그런 세력을 ‘사리판단이 현명하신 분들’이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최근 북한인권문제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를 보면 그렇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세요

자, 이제 입장 바꿔 생각해보자.

함경북도 청진시에 사는, 김정일 체제에 불만이 많은 K씨는 매일 밤마다 두꺼운 솜이불을 뒤집어 쓰고 RFA(자유아시아방송)와 VOA(미국의 소리) 등 단파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국내외 정세를 가늠한다. 이번에 결의안을 제출한 국회의원님들이 운동권 시절 평양방송, 구국의 소리 방송을 애타게 들었을 것이듯 말이다.

지직거리는 방해전파에도 귀를 쫑긋 세우고 방송을 듣던 K씨는 한국과 미국, 일본, 유엔인권위원회 등에서 북한인권관련 법안을 만들고, 대북인권결의를 하고, 북한인권 특별보고관을 임명해 조사활동을 벌인다는 소식에 마음속 깊이 만세를 불렀다. 소리쳐 외치지는 못하지만 벅찬 감동이 오죽 하겠는가.

그런데 뒤 이은 보도가 그를 질리게 한다.

“민주노동당 박용진 대변인은 주한 미국대사관에 미 상원의 북한인권법 통과에 대한 항의서한을 전달했습니다. 유엔인권위의 대북인권결의안 표결에 맞춰 남한의 진보단체들은 이에 반대하는 참가단을 꾸려, 회의가 개최 중인 스위스 제네바에 급파했습니다. 미국과 일본이 대북협상에 인권문제를 주요 의제 가운데 하나로 설정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한국의 국회의원들이 반대하는 결의안을 제출했습니다. 이상,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RFA 이수경입니다.”

딸깍-. K씨는 라디오를 꺼버린다.

“우라질 놈들, 자기네들은 배부르고 호강한다 이거지? 자기네들끼리 잘 먹고 잘 살겠다 이거지? 라디오 하나 마음껏 듣지 못하는 우리더러 ‘너희 앞가림은 너희가 하라’, 이 말이지?”

청진 주민 K씨 “똑같은 X들…”

삼복 더위에 이불 뒤집어 쓰고 땀을 뻘뻘 흘리며 들었건만 고작 이런 방송이나 나오다니, 침을 퉤퉤 뱉으며 K씨는 담배 하나를 피워 물었다. 길게 한 모금을 빨아들이고 한심스러운 듯 긴 연기를 내뿜던 K씨는 갑작스레 평소에는 듣지도 않던 북한산 라디오의 전원을 켰다.

“한나라당이 반공화국 인권법률안을 채택하겠다고 나선 것은 북과 남 사이에 인권문제를 가지고 갈등과 쐐기를 치려는 것이며 발전하는 북남관계를 대결로 되돌리고 조선반도의 평화와 통일분위기를 깨치려는데 있다. 남조선의 각계층 인민들은 한나라당의 책동을 절대로 용납하지 말고 하루빨리 정계에서 들어내야 한다.”

<조선중앙방송>에서는 한나라당 의원들이 북한인권관련법안을 제출한 것을 비난하는 내용의 논평이 방송원의 ‘전투적인’ 목소리와 함께 흘러나오고 있었다. K씨는 무릎을 탁 치고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북방의 찬 밤공기가 밀려들어왔다.

“햐~ 고놈들, 똑같네, 똑같아.”

정전으로 암흑천지인 청진 시내에 멀리 김일성 동상에만 환히 불이 밝혀있고, 어디에선가 컹컹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곽대중 기자 big@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