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戰에 대한 중국인의 기억..단둥 항미원조기념관

정전협정 체결 55주년을 맞는 27일. 중국 단둥(丹東)에 있는 항미원조(抗美援朝)기념관에는 오전부터 중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속속 이어졌다. 북새통을 이룰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기념관 주차장에서는 멀리 지린(吉林)성과 상하이(上海)의 번호판을 단 관광버스가 목격됐다.

기념관 벽면에 걸린 플래카드가 이날이 바로 ‘항미원조 승리 55주년’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있는 가운데 울타리에 게시된 ‘항미원조정신을 영원히 빛내이자’는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가 눈길을 잡아 끌었다.

중국인은 우리가 ‘6.25 전쟁’ 혹은 ‘한국전쟁’으로 부르는 이 전쟁에 ‘미국에 대항해 조선(북한)을 도왔다’는 의미를 담아 ‘항미원조전쟁’이라는 이름을 붙여 기억하고 있다.

때문에 항미원조기념관의 각 전시실은 ‘미제와 남조선의 침략에 용맹하게 맞서 승리를 이끌어낸 중국인민지원군의 활약상’에 초점을 맞춰 전쟁 당시 사용했던 무기와 물자, 각종 문서, 기록사진, 노획물 등이 체계적으로 전시하고 있었다.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전장을 누빌 때 타고 다녔다는 지프는 지금이라도 시동을 걸면 ‘부르릉’ 소리를 내며 달려 나갈 듯 보존 상태가 좋았다. 한국전쟁에서 국군과 미군을 괴롭혔던 중국인민지원군의 갱도전투 현장도 당시의 모습 그대로 재현돼 있었다.

기념관 광장 한쪽에 우뚝 솟은 항미원조기념탑은 정남향으로 신의주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 기념탑의 높이를 53m 정한 것은 항미원조전쟁이 승리로 끝난 1953년을 기념하기 위해서라는 게 기념관측의 설명이었다.

기념탑은 전망대의 역할도 하지만 탑 내부에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중국인민지원군들의 명부가 보관돼 있는 위령시설로서 더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중국은 한국전쟁 기간 중국인민지원군 67만3천명(비전투인원 포함)이 사망하거나 부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항미원조기념관에는 한국인이 관심을 가질 만한 전시물도 적지 않다.

김일성과 박헌영이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로 명의로 1950년 10월1일 마오쩌둥(毛澤東)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해 9월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곤궁에 빠진 북한군의 다급한 처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중국인민지원군이 노획한 국군 수도사단 백호연대기는 지금도 기념관의 중요 전시물 중 하나로 꼽힌다.

중국인민지원군 제68군 203사 정찰대 부대장이었던 양위차이(楊育才)는 1953년 7월13일 금성전투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국군의 정예부대 수도사단 소속 백호연대에 침입해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하사한 부대의 상징인 백호기를 빼앗아오는 ‘전공’을 올렸다.

지금 백호기는 바탕이 누렇게 빛이 바래있었지만 깃발 중앙에 그려진 백호의 모습만은 여전히 생생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언제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이 백호기의 운명에 대해서는 누구도 장담을 하지 못했다.

기념관에는 미군이 한국전쟁 당시 벌였다는 각종 세균전의 증거물도 전시되고 있다. 당시 미군이 투하했다는 세균폭탄, 공산주의 국가 및 제3세계 인사로 구성됐던 세균전 조사단의 사진, 세균전에 참가했다는 미군 전쟁포로의 진술서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는 미군이 실제로 한국전쟁에서 세균전을 벌였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중국인은 적어도 ‘미제 침략군의 만행’을 입증하는 역사적 사실로 기억하고 있다.

항미원조기념관은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과도 인연을 갖고 있는 곳이다.

후 주석은 1993년 7월25일 중국공산당 서기처 서기 신분으로 정전협정 체결 40주년을 기념해 재단장한 단둥(丹東) 항미원조기념관 신관 개관행사에 참석해 개관 테이프를 직접 잘랐다. 후 주석은 다음날부터 29일까지 중국공산당 대표단을 이끌고 평양을 방문했다.

하지만 ‘피로 맺어진’ 북중 혈맹관계의 상징으로 꼽히는 이 기념관도 문화대혁명의 광풍만은 벗어날 수 없었다. 기념관은 문화대혁명 시기 북중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1966년에 폐관됐다 6년 만인 1972년에 다시 문을 열 수 있었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