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온 DJ, 국군포로 귀환 말할 줄 알았는데…”







▲’운명의 두날’의 저자 유영복 씨는 ‘북한에서 국군포로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천대와 차별을 받았다’고 말했다./김봉섭 기자

지난해 추석계기 이산가족 상봉행사에 그동안 전사자로 처리됐던 6·25전쟁 국군포로 4명이 북측 상봉신청자에 포함된 일이 있었다. 그동안 국방부가 탈북자나 귀환포로 진술 등을 토대로 파악한 생존자(500명) 명단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북한이 당시 정부가 파악하지 못한 ‘국군포로 생존자’의 존재를 추가로 공개한 것은 우리 정부에 대북지원 등을 받아내기 위한 협상전략의 일환으로 해석됐었다.


그렇지만 북한은 아직까지도 ‘국군포로’라는 존재 자체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다만 ‘국군으로 복무하다 전향해온 자’라고만 밝히고 있다. 그러나 북한을 탈출해 귀환한 국군포로들은 ‘개인의 자유의사와는 상관없이 북한 당국의 강제에 의해 남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더군다나 이들은 평생 함경도 등 오지의 탄광에서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이들의 자녀들은 평생 ‘국군포로’ 가족이란 딱지가 붙은 채 진학과 취업, 결혼 등에서 차별의 대상이 됐다.


현재까지 북한을 탈출해 귀환한 국군포로는 79명이고, 그중에 16명은 이미 사망했으며, 사망자 중 유골로 돌아온 경우도 5구나 된다. 10대 초반에 전쟁에 참여했다고 해도 생존자 대부분이 현재 70대 중후반의 고령이라는 점에서 과연 현재 몇 명이 생존해 있을지 추정하는 일도 쉽지 않다. 그런 만큼 귀환자들의 증언은 한국현대사의 소중한 기록이다.


그런 점에서 국군포로 출신 유영복(82, 2000년 한국 입국) 씨가 최근 펴낸 회고록 ‘운명의 두날'(원북스 刊)이 후세대들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크다.


유 씨는 지난 17일 ‘데일리NK’와 인터뷰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지키려고 한 동료들의 억울한 죽음을 증언하고 대변하기 위해 (남한에) 내려왔다”고 말했다.


그는 책의 프롤로그를 통해서도 “나는 한국에 와서 행복하고 보람 있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럴수록 북한에서 굶주리며 같이 고생하던 동생들과 자식들이 수시로 생각난다. 국군포로인 그들이 이렇게 번영하고 발전된 조국의 모습을 단 하루라도 볼 기회가 있다면, 자신들이 목숨 바쳐 대한민국을 지켜냈다는 것에 커다란 긍지를 느끼며 기뻐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중공군의 포격으로 초소가 무너지고 흙더미가 나를 덥쳤다. 가슴까지 묻힌 나는 꼼짝할 수 없었다. 그렇게 움직일 수 없는 나를 중공군이 생포해갔다. 내 인생의 갈림길이었다.”


유 씨는 6·25 전쟁 초기 강제로 의용군에 끌려가 ‘인민군’의 편에 서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됐다. 그러다 국군에 생포돼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 수감됐다. 2년 간의 복역 끝에 석방됐지만 인민군이었다는 과거를 전공(戰功)으로 대치하기 위해 국군에 입대하게 된다. 하지만 다시 중공군의 포로가 되는 비극적 운명을 맞게 된다.


이후 그는 북한의 평안남도 평안군 포로수용소로 끌려가 탄광에서 노역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우리가 죄수도 아니고 포로니까 언젠가는 보내줄 것이다. 설마 10년까지야 부려먹겠는가. 지휘관들도 우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동료들끼리 다독이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유 씨는 북한 당국이 발급한 공민증을 받아 든 순간 귀환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 북한은 “국군포로인 너희들을 북한 인민으로 받아들여 주겠다. 열심히 일하면 당원이 될 수도 있다”며 선심을 쓰듯 국군포로들을 회유했다.


포로생활 중 뒤늦게 알게 된 어머니와 동생들의 소식도 북한 정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됐다. 남한에 있을 줄 알았던 어머니와 동생들이 황해도 지방으로 피난을 온 상태였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동생들까지 부양해야 했던 그는 국군포로라는 꼬리표를 떼고 당당히 살고 싶어 누구보다 열심히 일 했다. 북한에 있었던 동생들의 출세길을 ‘국군포로’인 자신이 막고 싶지 않았다.


유 씨 뿐 아니라 국군포로들은 북한에서 일평생 탄광에 내몰려 혹독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국군포로) 동료들은 탄광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을 흘리고 숨을 못 쉰다. 탄광차를 밀다가, 갱도를 폭파시키다가 죽은 동료들이 한 둘이 아니다.”


성실하게 근무한 덕분에 훈장을 6차례나 받기도 했다. 하지만 ‘국군포로’란 주홍글씨는 끝내 지워지지 않았다. 자신은 물론 가족들도 노동당원이 될 수 없었고, 동생들은 인민군 복무도 하지 못했다. 불만의 화살은 모두 그에게로 돌아왔다.


동생들은 유씨에게 “차라리 우리가 북한에서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원망을 털어놓기도 했다. 동생들의 차가운 시선과 자녀들의 분가, 끊긴 배급 등은 그를 더욱 벼랑 끝으로 몰았다. 노쇠한 그를 보살필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견디기 힘든 시간 속에서 그에게도 희망이 찾아왔다. 바로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북한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을 TV를 통해 봤을 때였다.


그는 “김 대통령이 ‘써먹을 대로 써 먹은 국군포로는 이제 그만 돌려달라’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그런 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면서 “한국을 지키다가 붙잡힌 사람들을 위해 그런 말 한마디 못하냐”면서 분개했다.


이어 “그때가 내 나이 만 70세였는데 동생들도 나를 배척하고, 북한사회는 국군포로라고 천대해 평생을 탄광에서 썩게 만들었으면서, 배급마저 주지 않았다. 그래서 탈북을 결정했다”며 “살 만큼 살았으니 탈북 과정에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죽기 전에 남쪽에 계신 아버지도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2000년 한국으로 귀환한 이후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휠체어 앞에 무릎을 꿇으며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를 부르고 나자 비로소 목이 메었다. 아버지의 앙상한 손이 내 가슴을 찢어지게 했다. 아버지는 나를 유심히 쳐다만 보실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0세 새파란 청년으로 나갔던 내가 백발이 되어 나타났으니 무리는 아니었다.”


책의 말미에는 그의 마지막 바람이 담겨 있었다.


“그들(국군포로)이 얼마나 고국 땅을 그리워 했으면, 죽은 후에라도 내 유품을 조국땅, 고향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했을까. 정부는 북한과의 협상으로 국군포로 유해를 모셔와야 한다. 그것이 나라를 위해 몸 바친 국군장병들을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