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직전 동독상황이 한반도 통일에 주는 시사점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동독이 멸망하고 독일이 통일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련이 동독을 포기할 가능성이 없는 데다 동독도 사회주의권의 최고 복지국가로서 안정된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인식을 주어왔기 때문이다.


동독 집권층과 주민들은 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동독이 사회주의권에서는 가장 발전된 선진복지 국가이고, 소련이 버티고 있는 한 동독 공산체제가 무너질 가능성이 전혀 없고, 동독에서는 물론 서독에서 조차도 적극적으로 통일을 주장하는 정치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안정된 동독의 호네커 정권


1980년대 중반 이후 폴란드, 체코, 헝가리 등 동유럽 공산정권들이 주민들의 개혁요구에 몹시 시달리고 있을 때 동독 공산정권은 호네커 사회주의통일당(SED:동독공산당) 서기장 겸 국가평의회 의장이 19년째 집권하고 있는 가운데 매우 안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끔 소규모 시위가 있기는 했으나 조직적 반체제 세력도 없고 시위자들의 요구사항도 여행자유의 확대, 평화, 인권, 환경보호 등 체제개혁 요구와는 거리가 먼 내용이었다. 1989년 5월 실시된 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 공산당과 그 위성정당이 98.85%의 높은 지지를 얻었다. 특히 호네커 서기장은 1971년 집권 이후 임금인상, 휴가연장, 주택공급 및 여행자유 확대 등으로 관용적 지도자라는 평을 듣고 있어 동독 공산정권이 붕괴될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허울뿐인 세계 11대 공업국, 사회주의권 최고의 복지국가


동독은 공산국가 가운데는 경제와 기술 수준이 가장 높고 복지체제도 잘 되어 있는 부강한 나라로 알려져 왔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동독의 1989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9,703 달러였고 그 이전 5년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3.02%로 서독의 2.66%를 앞질렀다. 따라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도 “동독은 동유럽권에서 가장 개발되고 번창한 나라이며 세계 주요 공업국가의 하나”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통일 후 밝혀진 바에 의하면 동독의 경제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한 푼도 없다던 외채가 200억 달러에 달해 매년 총 외화 수입의 62%를 외채이자 지불에 써야 했다. 1990년 이후부터는 매년 서독으로부터 55억 내지 65억 달러를 얻지 못하면 국민생활 수준을 30% 이상 낮추어야 할 상황이었다. 동독의 경제상황은 서독 측 예상수치의 30% 수준이었고 산업생산성은 서독의 25% 수준에 불과했다.


동독경제가 이렇게 파국에 빠진 것은 근본적으로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모순에 기인하지만, 직접적으로는 1980년 이후 중점적 육성대상이었던 전자 및 화학분야 투자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서독과 힘겨운 복지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연평균 성장률 3.6%보다 훨씬 높은 연평균 7% 수준으로 복지지출을 증가시켜 성장 잠재력이 잠식되었기 때문이다.


1990년 3월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로 집권한 동독 드메지어 정부가 서독과의 신속한 통합을 추진한 것은 서독사회를 동경한 동독주민들의 열망 때문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열악한 경제사정 때문에 동독이 독자적으로 생존해 나가기 어렵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견고한 동독의 안보·보안 체제


동독의 보안체제는 어느 나라보다도 견고했다. 9만 5천 명의 정규요원, 18만 명의 유급협조자, 중무장한 1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갖춘 비밀경찰 슈타지(Stasi)가 주민 62명당 1명꼴로 보안요원을 배치하여 거미줄 같은 보안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악명 높은 나치 보안기관인 게슈타포가 8천만 명의 주민감시를 위해 정규요원 3만 2천 명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인구 1,700만 명의 동독으로서는 엄청난 숫자였다. 더욱이 동독은 소련의 최일선 방어망으로 38만 명의 군인과 16만 명의 군속 등 총 54만 명의 소련 군사요원이 주둔하고 있었다. 따라서 동독 공산정권이 붕괴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국제적으로도 확고한 지위 유지


대외적으로도 동독의 지위는 확고했다. 서독의 162개국보다는 조금 적지만 미국, 프랑스, 영국 등 세계 134개국과 수교하고 있었고 서독과는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하고 그다음 해에는 유엔에도 함께 가입했다. 동서독 간에는 통행협정, 방사능연구협력협정 등 13개의 협정이 체결되어 있었고 정상회담도 7번이나 개최되어 서독과는 별개의 ‘사회주의 독일’을 건설하려던 동독의 노력은 이미 확실하게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더욱이 독일이 통일되기 위해서는 2차 대전 전승 4대국의 동의를 얻어야 했고 주변국들이 독일통일을 수락할 가능성이 없어 동독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서독 주도하에 통일이 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해 보였다. 따라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동독 주민들은 통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통일에 대한 열망이나 기대도 갖고 있지 않았다.


통일직전 동독상황이 주는 시사점


표면상으로 매우 안정된 것으로 보였던 동독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불과 몇 달 후 독일이 통일된 것은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첫째, 억압체제 하에서는 주민들의 생각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동독 공산정권은 동독혁명 직전까지 공산정권에 대한 지지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 생각하여 주민들 사이에 공산정권에 대한 염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었다.


둘째, 공산국가의 각종 통계자료는 신뢰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동독의 경우 정확한 통계작성에 노력하고 있었고, 동서독 경제학자들이 자주 회합하고 자료도 교환했으나 일선 기업소와 행정기관들의 자료가 조작되어 동독 정부도 경제상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셋째, 억압체제 하에서는 일단 혁명열기가 점화되기 시작하면 주민들의 생각은 더욱 빠른 속도로 변화해 간다는 점이다. 동독주민들은 평소 소련이 버티고 있는 한 동독의 개혁이나 변화가 어렵다고 생각하여 공산정권에 대한 반대의사 표시를 자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이 더 이상 동독 공산정권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자신들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시하기 시작했으며, 서독이라는 좋은 대안이 있었기 때문에 동독 공산정권에 대한 미련이나 기대를 과감하게 버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