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 치하 서울대 임시총장 이명선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0월8일 고향 영천에서 괴한의 저격에 만 38세로 유명을 달리한 역사학자 김성칠(金星七)이 남긴 일기는 1993년 창작과비평사(현 창비)에 의해 ’역사 앞에서’라는 책으로 발간됐다. 이 일기 중에서도 그의 한국전쟁 체험기는 인구에 회자한다.

당시 서울대 사학과 조교수로 있던 김성칠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서울대학교에서 전개된 저간의 사정을 증언한다. 이에 의하면 전쟁개시 3일 만인 1950년 6월28일 서울이 함락되고 7월6일 서울대에는 서울대 자치위원회가 결성된다. 유응호(柳應浩)가 위원장, 김일출(金一出)이 부위원장, 성백선(成百善)이란 사람이 상임위원이었다.

하지만 김성칠은 이들 모두가 이명선(李明善)의 지시를 받고 있는 듯하다고 적었다. 그의 이런 예상은 적중했다. 7월10일자 일기에는 북한 교육성에서 서울대 책임자를 발표했는데, 대학총책임자에 이명선이 지명되었던 것이다.

전시에 서울대 임시 총장을 맡게 된 이명선은 서울대 재직 교수들을 상대로 전원 의용군 대열에 나설 것을 독촉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이런 그도 9.28 수복과 함께 급히 월북하려 하다가 사망한 것으로 간주된다. 만약 이 무렵에 사망했다면 향년은 37세가 된다.

이명선은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젊은 국어국문학도인 김준형(金埈亨.40) 순천향대 연구교수가 발품을 팔아 내놓은 ’이명선 전집’(전4권. 보고사 펴냄)은 그런 물음에 대한 긴 답변서다.

이명선은 해방공간인 1948년에 유물사관에 입각한 ’조선문학사’를 낸 장본인으로 한국문학사에서 이름만 알려져 있을 뿐, 그 외 행적은 자세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 전집은 이명선 개인에 대한 연구는 물론이고 그를 둘러싸고 전개된 한국현대사의 구명에도 적지 않은 가교를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그의 약력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1914년 9월12일 충북 괴산군 불정면 문등리라는 산골에서 4남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한양대 교수를 역임한 고 이경선(李慶善. 1923-1988)이 바로 밑동생이다. 청주고보를 나온 그는 193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 11회로 입학하고 1940년에 동 대학 중문학과를 졸업했다. 학사논문은 ’루쉰(盧迅) 연구’.

1940-41년 휘문중학교 교사를 역임한 그는 해방 뒤인 46년에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조교수로 취임해 일하다가 안호상(安浩相) 문교부장관의 눈밖에 나고, 좌익교수로 낙인 찍혀 1949년 9월30일 서울대를 떠났다. 이런 그가 서울대로 복귀한 것은 김성칠의 일기에 의하면 한국전쟁 발발 직후였다.

김 교수가 정리한 그의 전집 중 상당부분은 아직 공간조차 되지 않은 것들이다. 그의 육필원고는 이명선의 딸인 이승연(李承燕)씨를 찾아가 얻었다고 한다.

30년대에 이명선이 채록한 태몽ㆍ설화ㆍ민요를 비롯해 루쉰의 작품 번역물, 신문이나 잡지 등의 대중매체에 발표한 글, 한국문학과 관련한 연구논문이나 저서류, 그의 창작 희곡 등이 김 교수의 노력에 의해 이번에 복권됐다.

이 중 1930년대에 번역한 노신 소품문(小品文)은 “어쩌면 최초의 루쉰 번역서가 될 수 있다”고 김 교수는 평가했다. 전4권 10만원./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