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장관 내정 송민순은 누군가

지난해 9월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북핵 6자회담이 우여곡절 끝에 9.19 공동성명을 채택하며 성공적으로 끝나자 “송민순이 없었다면 9.19성명이라는 작품도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었다.

타고난 협상꾼, 송민순(宋旻淳.58) 신임 외교장관의 끼는 이미 오래전부터 유명했다.

1990년대 초반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을 담당하던 미주국 안보과장 시절, 협상에서 좀처럼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능력으로 협상상대인 미측으로부터 군인보다 더 군인같다는 뜻에서 ‘커널(colonel.대령) 송’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청와대 앞인 내자동에 버티고 서있던 미군들의 숙소격인 내자호텔을 미국측 반대를 이겨내고 결국 철거시킨 일화는 지금도 외교가에 회자된다.

북미국장 때인 2000년 9월 대미 미사일 협상 당시 로버트 아인혼 미 국무부 차관보가 고위선을 통해 “정치적 타결을 하겠다”고 위협하자 “미국 대통령이 우리나라 대통령을 설득할 지는 몰라도, 그게 우리 협상팀을 설득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맞서 협상의 주도권을 잡고 유리하게 이끌었다는 얘기도 잘 알려져있다.

당시 미사일 협상에서 우리측은 사거리 180㎞이던 종전의 규정을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의 규정인 300㎞로 연장하는데 성공했다.

외교관으로서 그의 뚝심과 협상력은 참여정부의 최대 난제인 북핵 문제와 관련해 우리 정부의 6자회담 실무사령탑인 수석대표를 맡으면서 꽃을 피웠다. 그리고 물 만난 고기처럼 6자회담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그는 차관보에서 일약 장관급인 청와대 안보정책실장으로 발탁되는 ‘파격행보’를 하게 된다.

6자회담 고비고비에서 결정을 머뭇거리는 북한측 수석대표 김계관 외무성 부상에게 “(크리스토퍼) 힐 같은 친구를 도와야지, 이런 사람 아니면 다른 강경파하고 협상하고 싶으냐”고 몰아붙였다.

그런가하면 폴란드 대사 시절부터 깊은 우정을 쌓아온 힐 미국측 수석대표가 협상에서 고집을 필 때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미국과 반대편에 서는 것이지만 이렇게 나온다면 반대편에 서라고 강요하는 것”이라고 직설적으로 압박하기도 했다.

특히 철저한 보안속에서 진행되는 6자회담 과정을 특유의 비유와 암시를 섞어서 일반인에게 전달해 나름대로 평가를 받았으며 ‘비유의 달인’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카메라 앞에 서면 눈 둘 곳을 몰라하는 그는 경상도 사투리를 써가며 외교현장의 미묘한 문제를 간결한 비유로 설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때론 비유의 깊이를 모르는 기자들로부터 “송민순 브리핑은 설명이 아니고 숙제를 내는 것같다”는 원성을 듣기도 했다.

제임스 릴리 전 주한 미대사는 “매우 논리적이고 위트가 있다”고 했다. 영어 역시 간단하고 명료하게 사용한다. 이를 ’송민순식 영어’라고 외교부내에서는 부르는데 서울대 독문과 2학년을 마치고 춘천의 탄약병으로 근무하면서 ’리더스 다이제스트’로 공부한 결과라 한다.

1975년 대학졸업과 함께 외무고시(9기)에 합격해 북미1과장, 북미국 심의관, 장관보좌관, 대통령비서실 국제안보비서관, 북미국장 등 요직을 거쳤다. 김대중 정부 초기 임동원 외교안보수석 밑에서 비서관으로 ’햇볕정책’의 입안에도 참여했다.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시련의 시기가 있었다. 폴란드 대사를 마치고 2003년 본부로 복귀, 경기도 국제관계자문대사를 맡았다. 당시 차관보 유력후보였으나 동기인 이수혁 현 주독일대사에게 밀렸다.

북미국장 출신 엘리트 관료로서는 한직에 해당됐지만 그는 그곳에서 적극적인 활동으로 손학규 경기도지사의 신임을 얻었다.

청와대 안보실장으로 정신없이 바빠 요즘에는 운동을 거르기도 하지만 거의 매일 아침 운동으로 몸을 다지는 그는 외교부내에서 유명한 ’스포츠맨’이기도 하다.

미국측 6자회담 수석대표인 힐 차관보와는 서로 ’크리스’와 ’민순’으로 부를 정도로 가깝고 힐 차관보가 서울에 오면 직급을 떠나 반드시 해후한다. /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