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 납북된지 50년 넘어, 생사만이라도 확인했으면…”

“아버지와 아들은 하늘이 맺어준 관계입니다. 북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은 하늘이 맺어준 인연을 가지고 장난하는 사람들입니다.”

최성용 전후납북자가족연합회 대표(사진)가 15살이 되던 해인 1967년 연평도 앞바다에서 조업중이던 ‘풍복호’가 납북됐다. 풍복호에는 그의 부친을 포함해 8명이 타고 있었는데 이들 중 5명만 귀환했다. 그로부터 50년. 최 대표는 아버지가 귀환되지 못한 이유도, 생사도 그 누구에게도 제대로 전해 듣지 못했다.

다음은 최 대표와의 일문일답.

-아버지가 돌아오지 못한 이유를 무엇이라고 보나.

“아버지는 ‘북진호’의 함장으로 6․25전쟁 당시 맥아더 소속인 켈로부대(미국 극동군사령부 직할로 조직된 비정규전 부대)에서 활동하셨다. 아버지가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사실은 어렸을 적에 들었다. 북한 입장에서 아버지는 반동분자(반역자)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북한에는 반동분자의 재산을 몰수한다는 법이 있다. 인민재판에 회부된 아버지는 선박 1척을 빼았겼다. 남은 2척은 어머니가 관리했으나 운영 경험이 적은 터라 결국 파산했다. 6.25 당시 좌익분자 살해 혐의로 붙잡혀 생사확인도 못하고 있다. 돌아가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북한 정부가 공식적으로 확인해준 적은 없다.”

-전후납북자가족 송환 운동을 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무엇인가.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어머니가 돈을 대줄테니 한 명이라도 더 구해오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뉴스에서 비전향장기수 이인모 씨 북한 송환 사건 소식을 접하고 아버지의 유골이라도 찾아오라고 하셨다. 이후 1993년 4월 5일 이인모 북송 항의 플랜카드를 처음으로 임진각에, 판문점에 걸었다. 당시 납북자 송환운동은 처음이라 경찰들이 몰려오기도 했다. 이때 미군 여럿이 지나갔다. 카투사 한 명이 한글로 적힌 플랜카드 내용을 설명해주자 나에게 격려의 말을 전했다. 처음으로 시작한 송환 운동은 언론에 공개된 적이 없고, 당시 세상에 알려진 바는 없었지만 당시 미군의 격려에 힘을 많이 받았다.”

-아버지의 생사는 확인됐나.

“3개월 만에 돌아온다는 소식에 어머니, 형과 함께 인천 앞바다로 마중을 나갔다. 그런데 돌아온 이들 중 아버지는 없었다. 실망했다. 당시 납북 인원 8명 중 총 귀환자가 6명인데 이 중 5명은 무사히 돌아왔고, 나머지 1명은 간첩으로 현장에서 검거됐다. 그 이후 아버지의 소식은 듣기 어려웠다.

돌아가셨다고 생각해 유해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유해를 가지고 있다며 다가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뼛조각 들고 와서 속이기도 했고, 아버지의 켈로 부대 군번줄이라며 큰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다 가짜였다. 사기를 많이 당했다. 그런 과정에서 납북자와 국군 포로에 대한 정보를 많이 얻게 됐다.”

-국군포로 유해는 어떻게 들여왔나.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국군포로의 유해를 한국에 들여왔다. 경상북도 청도 출신인데, 고향에 묻고 싶다는 가족의 요청으로 유해를 찾게 됐다. 발각될 가능성이 높았는데 뼈 한 조각 빠짐없이 중국 모처에 파묻었다. 유해를 들여오기 위해 우리 정부와 협상을 했다. 중국정부와는 합의가 되었는데, 우리 정부는 처음에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항의를 계속했고, MBC에 제보했다. 메인 뉴스에 보도된 이후 상황은 바뀌었다. 이후 정부는 군악대, 의장대, 태극기 등 예우를 갖춰줬다. 인천공항에 첫 국군포로 유해가 들어올 때 기분이 좋았다. 국군포로 1호는 판문점을 거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왔다. 당시만 해도 정부에 매뉴얼이 없었는데 이후에 생겼다. 이후 총 8구가 추가로 들어왔다.”

-그동안 납북자 송환 운동하면서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나.

“국민 안전과 관련된 일인데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월호 사건의 1만분의 1이라도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지만 78년도에도 학생들이 5명이 북한에 잡혀갔다. 남쪽에 내려온 간첩들이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을 끌고 갔다. 이외에도 비행기 납치, 외국에서 납치, 순진한 어민들까지 싹 끌고 가 정권에 이용했다. 하지만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최근 ‘흥진호’ 납북 사건은 대통령이 사과를 했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피해자 가족들의 고충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5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돌이켜보면 노무현 대통령은 납북자 특별법을 만들어줬고, 면담도 몇 번 해줬다. 정권이 바뀐 이후 보수정권 10년간 납북자 문제 해결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지만 아무 진전도 없었다. 납북자 문제는 우리 국민의 문제이니 보수이든 진보이든 성향에 따라 가려 해결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 챙긴다는 입장에서 가족의 생사만이라도 알려 줬음 좋겠다.”

-비전향 장기수들은 북한에 가서 보상을 받았다고 하던데.

“맞다. 북한에서는 이들에게 대접을 잘해줬다. 햇볕정책 시기 김정일은 비전향 장기수 63명에게 평양 최고의 아파트와 벤츠 자동차를 선물해준 것으로 알고 있다. 국민적 영웅대접을 받은 반면 우리 정부는 납북자나 국군포로 가족들에게 생사 확인조차 시켜주지 않고 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은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이들이 잡혀갔기 때문에 납북이후 경제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대통령이 납북자 가족들과 밥 한 끼 먹는 사진만 올라가도 북한이 이렇게 무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정부는 그간 국군 포로 및 납북자 송환 등을 북한에 요구한 적이 없었나.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3년 이인모 씨 송환 사건이 발생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2년 9월 3일에 비전향 장기수 63명을 우리 국군포로나 납북자에 송환 등 아무 조건 없이 북으로 보냈다. 63명을 북으로 보낼 때 북한에 납북된 가족들과 맞바꿔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송환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집회에서 두들겨 맞기도 했다. 6.15공동선언에서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남북이 노력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납북자나 국군포로는 제외됐다. 인권 운동을 한 두 대통령에게 묻고 싶다. 남한에 있는 피해자(가족)들은 어떻게 해야하냐고. 국군포로와 납북자를 맞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나 그 기회를 놓쳤다. 나는 그 이후부터 더 활발히 활동했다. 국가는 국민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해야한다.”

-현 정권은 어떨 거라고 보나.

“문재인 대통령은 제천 참사 때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겠다고 하셨다. 당연히 납북자 문제도 이 같은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문재인 대통령은 당시 비서실장)이 방북할 당시 청와대 앞에서 단식을 한 적이 있다. 그러자 대통령은 임기가 끝날 때까지 전후납북자 관련 특별 조치법이 나올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 못해 죄송스럽다고 했다. 이 같은 말이 실행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납북자 송환 운동을 하면서 김 씨 일가 3대 체제를 다 경험했다. 어떤 생각이 드나?

“아버지와 아들은 하늘이 맺어준 관계이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은 하늘이 맺어준 인연을 가지고 장난하는 사람들이다. 벌써 50년이 지났는데 북한은 아버지의 생사조차 알려주지 않고 있다. 많은 돈이 들어가더라도 아버지의 유해를 찾으려 했다. 이후 아버지 소식은 오래전 끊겼고, 결국 아버지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북한에서 갖은 수모를 당하며 외로이 계셨을 아버지 생각하니 그저 김 씨 일가가 원망스럽다.

북한이 생사확인을 안 해주면 우리 정부가 북한에 요구를 해야 한다. 현재 생사도 모르는 516명에 대해 사망날짜라도 알려줬음 좋겠다. 통일부와 남북적십자사의 노력으로 7명의 사망날짜는 받은 상태이다.”

-북한정권과 접촉해 납북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다.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978년 홍도에서 납치된 이민교 학생의 어머니는 역대 대통령에게 ‘우리 민교가 북한에서 잘 살았으면 좋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대신 죽기 전에 한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편지를 써왔다. 우리나라 국민의 일이니 만큼 대통령께서는 납북자 문제를 잊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가족들의 생사만이라도 확인할 수 있게 힘 써 주셨으면 좋겠다.”



▲이산가족상봉 행사에서 남편을 송환해달라고 요청하는 최성용 대표의 어머니 모습(위). 최성용 대표가 가족과 함께 판문점에서 첫 납북자 문제 플랜카드를 걸어 놓은 모습.(아래) /사진=가족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