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파 울던 북한 처녀 이젠 시카고 투잡스족

▲ 탈북자 한국 생활 적응 학교 (기사 내용과 무관) ⓒ데일리NK

“힘든 생활이지만 자유와 희망이 있어 버틴다.”

2006년 5월과 2007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미국으로 망명한 31명의 탈북 난민 중 14명이 도미(渡美) 후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의 미국 망명과 정착을 돕고 있는 ‘두리하나 선교회 USA’ 가 워싱턴 DC에서 지난 18일부터 20일까지 2박 3일 일정으로 개최한 제1차 재미 탈북난민 수양회 겸 연례모임에서다.

“영어도 배우고 돈도 모으느라 정신 없습니다.” 여느 남한 또는 미국인 여대생과 다를 바 없이 맵시 있는 차림새를 한 강화순(함흥 출신, 2006년 입국) 씨가 ‘미국 생활이 어떠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뉴욕 주의 작은 대학도시에 함께 망명한 어머니와 살고 있다는 강 씨는 한 미국 식당에서 시급 8달러를 받으며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다. 한인 동포가 운영하는 가게에서도 일해봤지만 영어를 빨리 배울 것 같아서 미국 식당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강 씨의 영어 회화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미국인 목사와의 대화도 막힘이 없었다.

옆 자리에 앉은 이은주(여·가명) 씨는 이른바 ‘투잡스’ 족이었다. 시카고에 살고 있는 이 씨는 2007년 2차 망명단 일원으로 미국에 입국했다. 이 씨는 “처음에는 지역 한인 교회로부터 소개받은 동포 가정에서 3개월을 살았다. 석 달 동안 모은 돈으로 차도 사고 조그만 방을 구해 나가 살고 있다. 잠은 4시간 밖에 못 자지만 내가 일한 만큼 돈을 벌기 때문에 힘든 줄 모르겠다”고 말했다.

“굶어 죽을줄 알았던 내가…” 새 삶 찾은 美 망명자들

“10년 전 고난의 행군 때 3일을 굶고 방안에 누워 ‘사람이 이렇게 죽는구나’라고 생각했던 내가 미국에 와있다는 게 꿈만 같다”는 최미향(여·가명) 씨는 “북한과 중국에서는 아무것도 내 것이 없었지만 미국에선 내 것이 있다”며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중국에서는 내가 북한 출신이라는 것을 숨기고 다녔다. 그러나 지금은 당당하게 노스 코리안(North Korean)이라고 말한다”며 미국에서 누리고 있는 자유에 대한 감상을 전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제2의 삶을 시작한 이들이 마냥 행복에 겨운 것만은 아니다.

우선 탈북 정착인들은 다른 한인 동포들과 마찬가지로 영주권 취득이라는 난관을 넘어야 한다. 난민으로 망명한 사람에게는 1년 내에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도록 하는 법규에 따라 2006년 입국한 1차 망명자들은 벌써 영주권을 얻었다. 그러나 2차로 들어온 25명은 아직 영주권을 받지 못했다.

밀입국자에 비하면 이들의 영주권 취득은 쉬운 일이지만, 아직 신분이 불안정하다는 사실은 중국에서 무국적의 설움을 톡톡히 겪었던 탈북자들에겐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다. 그래서 두리하나 USA에서도 연례 모임 둘째 날에는 한인 이민변호사를 초청해 이민 법규와 영주권 신청 방법에 대해 따로 강연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들 탈북 망명자들을 심적으로 괴롭히는 것은 외로움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다.

“생일 때가 제일 힘들어요. 후원해주고 있는 선생님(한인 동포교회 집사) 가정에서 생일 파티도 열어주고 선물도 주셔서 감사하지만 그래도 생일날엔 가족이 그리워서 울어요.”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 카운티에 정착한 장하나(여. 가명)씨는 가족들 생각만 하면 아직도 눈물이 난다며 말끝을 흐렸다. 대부분의 가족이 북한에 남아있는 이들은 특히 사진 촬영에 극도의 거부감을 보였다.

중국에서 어린 아들과 헤어졌다는 김옥희(여. 가명) 씨는 한인 교회에서 열린 기도모임에서 아들과 떨어진 사연을 전하며 눈물을 흘려 주위를 숙연케 하기도 했다. 청진 출신으로 2006년 망명해 뉴저지에 살고 있는 김 씨는 “미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하며 인종차별적인 욕도 들어보고, 지하철 타고 출퇴근하면서 너무 서럽고 외로워서 펑펑 운 적도 있다”고 말했다.

“美 망명에 대한 환상은 금물”…자립 위한 눈물겨운 노력 필요해

연례모임에 참석한 탈북 난민 중 몇 안 되는 남성이었던 최혁(가명) 씨는 “다른 탈북자들이 미국에 대해서 환상을 갖지 않았으면 한다”고 충고한다. 그는 “미국에서의 생활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망명자로서 살아가는 것은 일반적인 이민 생활보다 배로 힘들다. 이곳에서 일한 것 이상으로 벌 수 있다고 환상을 가지는 것은 금물”이라고 말했다.

이날 연례모임에 참가한 14명을 비롯해 31명의 탈북 정착민들은 모두가 중국으로 탈출했다가 라오스나 태국 등 동남아를 거쳐 선교단체의 도움으로 미국에 망명한 케이스다.

2004년 연방 의회가 북한 인권법을 통과시킨 뒤에도 미국 정부는 실제로 탈북 난민들을 받아들이는데 소극적이었다. 그 사이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가 미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했다가 미 법원으로부터 “한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으로 정치적 박해를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은 망명자격이 없다”며 기각 당하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최근 중남미 출신 이민자들의 대량 불법입국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미국 정부는 2006년에서야 처음으로 탈북 난민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해 이제 겨우 31명을 채웠다.

두리하나 USA의 이사장으로 이번 행사를 주관한 워싱턴 한인 감리교회의 조영진 목사는 제1호 미국 정착 탈북자들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미국에 정착한 첫 노스 코리안들입니다. 앞으로 북한 자유법(North Korea Freedom Act)에 따라 미국이 더 많은 북한 난민들을 받아들이냐 마느냐는 이들이 여기서 성공적이고 모범적인 삶을 사는지에 달려있습니다.”

실제로 각 지역에 흩어진 탈북 난민들을 주로 후원하고 있는 한인 동포 교회 관계자들의 당면 목표는 난민들의 자립이다. 현재 31명의 미국 망명 탈북자들은 각자 정착지역 내 한인 교회와 결연을 맺고 심적, 물적으로 도움을 받고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이들이 남의 도움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특히 개인주의와 자립, 자조를 강조하는 미국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최소한 그 점에서만 본다면 미국 역사상 첫 북한 출신 이민자들의 미래는 밝아 보인다. 동남아를 떠돌던 이들 탈북자들을 미국으로 망명시킨 두리하나의 천기원 대표가 “이 친구들이 너무 열심히 일하고 있어 건강이 탈날까 그게 걱정”이라고 말할 정도다.

이은주 씨는 “태국에 있을 때 감옥(난민 수용소)에 있었는데 거기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의지와 인내심을 배웠다. 미국 생활이 아무리 힘들어도 감옥만큼 힘들겠나 하는 생각으로 살아가겠다”며 각오를 전했다.

“중국에서는 힘들어도 들킬까 무서워 제대로 울 수도 없었어요. 미국에선 최소한 힘들면 울 자유는 있잖아요. 앞으로 힘들 땐 실컷 울고나서 다시 정신차려 열심히 살아야죠.”

유난히 체구가 작았던 이 탈북 여성은 어깨를 들썩이며 기자를 향해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