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제 식민지’와 舊운동권의 단지(斷指)

열린우리당 이광재 의원이 손가락을 잘라 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것이 ‘새삼’ 화제다. 포털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댓글을 보니 비난의 의견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중에는 “설마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손가락을 잘랐겠느냐”하는 의견들이 종종 눈에 띈다. ‘우리 국민들 가운데 순진한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80년대 운동권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아직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잘라 군대에 가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80년대, 그리고 90년대 중반까지도 운동권들 사이에서는 상식에 가까운 일이었다.

대한민국을 ‘미제 식민지’로 착각

운동권에 조금이라도 발을 깊게 담근 남학생이라면 어떻게든 군대를 가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썼다. 이유는 이랬다.

당시 운동권은 대한민국을 ‘미제(美帝)’의 식민지라고 생각했고, 국군은 미제의 용병(傭兵)이며, 그래서 군대에 가는 것은 미제의 용병이 되어 끌려가는 것이라 여겼다. 물론 80년대 초반 운동권 가운데에는, 이른바 ‘녹화사업’ 등으로 인해 ‘혹시 군대에 가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까’ 걱정한 사람도 있었지만, 이는 극소수 핵심 운동권에게나 해당할 사안이었다.

대다수는 잘못된 사회인식 때문에, 그리고 운동을 하다가 갑자기 군대에 가서 2~3년을 ‘썩는’ 것이 아까워, 군대에 가지 않으려 했다. 운동의 ‘공백기’를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군 제대를 하고 나서도 운동을 꾸준히 하는 사람이 드물었던 탓에, ‘사상의지가 약해질까봐’ 군대를 의도적으로 기피했다. 이러한 이유 이외에 다른 이유는 거의 없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그래서 운동권은 손가락을 잘랐다. 군대에 가기 싫어 그랬다. 술을 진탕 마시고 작두로 싹둑 잘라내곤 ‘결의’를 다졌다. 잘린 손가락 마디를 학내에서 주로 집회를 하는 광장 한 켠에 묻은 ‘자랑스런 선배’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후배들에게 회자되곤 했다.

내 주위에도 그렇게 손가락 발가락을 자른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이상의 이야기가 80~90년대 학생운동권의 ‘팩트’(사실)다.

‘시대의 탓’으로 얼버무리지 말라

다시 본론으로 되돌아와 이광재 의원의 경우를 보자.

앞서 “이광재 의원이 손가락을 잘라 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것이 ‘새삼’ 화제”라고 했다. 80~90년대 학생운동권의 ‘팩트’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정말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일이다. 문제는 그 ‘팩트’를 지금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광재 의원이 단지(斷指)의 이유를 그 동안 속여왔던 것에 대해서는 재삼 거론하고 싶지 않다. <월간조선>의 보도에 의해 이 문제가 불거지자 이 의원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글을 올리면서 “그 시절 행동을 결코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후회하지 않는 일을 왜 지금껏 숨겨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지나간 일을 갖고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다. 이 의원 개인적으로는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가슴 아픈 상처 가운데 하나이리라.

그러나 이 의원이 손가락을 자른 것을 ‘시대의 탓’으로 얼버무리려 하는 것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이 의원은 단순히 얼버무리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과거를 미화하는 계기로 삼으려는 듯하다.

일제시대에 적극적으로 친일을 했던 사람도 자신의 행적을 변명하며 “당시 시대상황이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독재에 협조했던 사람들도 비슷하게 말한다. “친일과 독재 협조를 민주화운동과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느냐”고 비판할 사람도 있겠지만 ‘시대의 탓’을 앞세우는 변명의 밑그림에는 공통성이 놓여있다.

386 세대 순수성마저 욕되게 말아야

국가의 법과 질서를 만들고 그 집행을 감시하는 국회의원이라면 일단은 ‘법과 질서’에 분명한 기준을 두어 사고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 의원은 군대를 기피할 목적으로 손가락을 잘랐고, 이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실정법에 위배된다. 공소시효가 만료되긴 했지만 공인(公人)으로서 과거 행적이 문제되면 솔직히 진실을 밝히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면서 자초지종을 밝혀야겠지만, 그에 대한 해석은 국민의 몫이다.

시대의 상황이 어떠했다느니 하는 것은 ‘남이 알아주든 말든 자기의 길을 가겠다’던 냉철한 80년대 운동권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비굴한 정치인의 모습만 남은 것 같아 씁쓸하다. ‘386’의 최후는 과연 이런 것인가.

솔직하게 용서를 구하라

조선노동당 문제 등으로 논란을 빚었던 이철우 의원의 사건 때부터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다. 과거사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왜 386 정치인들은 자신의 현재 신분을 망각하고 ‘시대’를 운운하는가. 그때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고 분명한 ‘팩트’를 밝히고, 그것이 이렇게 잘못되었다, 용서를 구한다, 딱 이렇게 말하면 되는 것이다.

‘사랑도 명예도 남김없이’ 살고자 했던 자신의 과거가 소중해, 그것이 조금이라도 구겨지는 것이 억울하기는 하겠지만 세상 모든 일에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기 마련이다. 산업화 세대의 오류는 샅샅이 찾아내 부정(否定)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이 민주화 세대는 무오류(無誤謬)와 순결무구로 남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탐욕이다.

혹시 ‘수령의 무오류성’을 기반으로 한 주체사상의 흔적이 아직도 그들 생각의 근저에 남아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 의원은 홈페이지에 “용서를 구하기도 이해를 구하기도 어려운 일”이라고 해명의 말을 시작했다. 천부당 만부당한 말이다. 이해를 해주는 것은 국민의 몫이고 이 의원은 용서부터 구하면 된다. 부모님이 주신 소중한 신체에까지 자해를 해 ‘이광재 학생’이 운동의 대의에 충실하고자 했을 때, 묵묵히 군대에 갔던 사람들이 수천 수만 명이다.

그들 모두를 아직도 ‘바보 용병’이라고 생각한다면 더욱 목을 뻣뻣이 세우되, 그렇지 않다면 무릎 꿇어 사죄하라. 좀 솔직하고 깔끔해져라. 이것이 공인의 자세다.

곽대중 논설위원(前 전남대 총학생회장) big@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