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제의에 ICBM으로 대응…“文, 대북구상 재조정 불가피”


▲북한 김정은이 4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4형 시험 발사 현장을 참관한 모습. / 사진=조선중앙TV 캡쳐

북한이 4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4형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고 밝히면서 남북관계 주도권을 잡고 대화 국면을 열겠다던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이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문 대통령은 그동안 북한이 핵·미사일 도발을 중단하면 조건 없는 대화에 나서겠다고 밝혀왔지만, 북한이 ICBM 발사라는 초강수를 두면서 현 정부의 대북 구상도 재조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북한이 이번 ICBM 개발로 국제사회가 제시한 레드라인을 넘어서게 되면서, 우리 정부도 국제사회로부터 마냥 ‘대화’를 내세운 대북정책을 지지 받기는 어려워졌다는 우려가 커졌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4일 데일리NK에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 구상 초기 단계에서 동력이 위축되거나 (정책 실행이) 지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면서 “그간 대통령께서 한미정상회담 등을 계기로 밝힌 대북 구상들이 실천적인 차원에서 다시 한 번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홍 실장은 “현재 언급되고 있는 북핵 해법 2단계 구상이 3단계로 조정돼야 한다. 1단계였던 핵 동결로 가기 전에 어떻게 하면 북한 핵·미사일 활동을 잠정적으로 중단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실질적인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라면서 “동시에 북한과의 대화 모멘텀을 만들기 위한 전략이 추가적으로 고민돼야 한다”고 밝혔다.

신범철 국립외교원 교수도 “우리 정부로서는 상당히 어렵고 도전적인 입장에 놓이게 됐다”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대화와 제재 병행 전략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고,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접근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북한이 ICBM 시험 발사를 통해 비핵화를 전제로 한 한미의 대화 제의에 정면으로 반발하면서, 향후 북한이 비핵화를 의제로 한 대화에 나올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이에 따라 한국과 미국이 제시할 수 있는 북핵 협상의 조건 역시 기존의 ‘핵·미사일 개발 중단’에서 ‘핵·미사일 확산 중단’ 등으로 수정될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신 교수는 “이번 ICBM 발사로 북핵 동결 조건이 달라졌다고 볼 수 있다. 과거에는 북한의 ICBM 개발을 막기 위한 동결을 고민했다면, 이제는 미사일 보유량 증강이나 확산을 막는 것으로 동결 성격이 바뀌게 될 수 있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는 북한과의 대화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변화된 성격의 동결을 갖고 협상을 고민하지 않을까 싶다”고 내다봤다.

홍 실장은 “한미정상회담이 끝난 지 사흘 만에 북한이 ICBM을 발사한 건 한미의 비핵화 의제를 수용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뜻을 명확히 한 것”이라면서 “북한은 국제사회로부터 핵 보유를 인정받고 비핵화가 아닌 군축 프레임으로 가는 국면을 유도하기 위해 핵·미사일 위력을 최대한 과시하려 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4형 시험 발사를 지시한 김정은의 친필 서명 / 사진=조선중앙TV 캡쳐

이처럼 북한이 핵 보유국 진입 야욕을 재확인하면서 오는 7, 8일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리는 G20(주요 20개국)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이 발신하기로 한 대북 메시지도 수위 조절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이번 ICBM 발사로 미국의 추가 독자제재나 유엔 안보리 차원의 추가 조치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대화’와 ‘교류’를 부각한 대북기조를 설득하기엔 국제적 압박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신 교수는 “G20 계기에는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인 ‘대화와 압박’의 뜻을 모두 전달해야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임시적으로나마 대북 압박에 조금 더 비중을 둘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홍 실장은 “최근 한국과 미국, 중국은 압박과 제재 외에 대화의 창도 열어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있었는데, 이 와중에 북한이 미 본토 타격이 가능한 ICBM 개발에 성공하면서 3국도 매우 시급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면서 “당분간 3국이 보조를 맞춰 진행하려던 대북정책도 재조정되거나 일단 압박 중심으로 갈 수밖에 없는 국면이 펼쳐진 셈”이라고 말했다.

한편 북한이 ICBM 시험 발사에 이어 6차 핵실험까지 강행할지 주목된다. 그간 북한은 핵실험 이후 위성으로 가장한 장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에 나서는 패턴을 보여왔는데, 이번엔 ICBM 발사에서 핵실험 수순을 밟을 수도 있다는 관측이다.

실제 우리 군 당국은 북한이 언제든 6차 핵실험에 나설 준비가 돼 있다고 보고 있으며, 북한 역시 ‘최고지도자 명령만 있으면 핵실험이 가능하다’고 주장해온 바 있다.

다만 이미 ICBM 시험 발사를 통해 핵·미사일 위력을 증명해보인 북한이 이후엔 본격적인 북미 대화 국면을 전개하려 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신 교수는 “핵실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북한이 핵·미사일 능력을 다 입증했기 때문에 북미 대화부터 제기하고 나설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런 가운데 우리 정부는 북한 ICBM 발사에 대응해 국제사회 공조 속에서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것이라 밝혔다. 조준혁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북한의 ICBM 시험 발사 성공 발표가 있기 1시간 전 정례브리핑에서 “이번 도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으로 판명될 경우 정부는 이에 맞춰서 미국을 비롯한 안보리 이사국, 그리고 국제사회와 함께 상응하는 조치를 협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날 북한 ICBM 시험 발사 성공 발표를 접한 직후 “북한이 한미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평화적 방식의 한반도 비핵화 구상에 호응하지 않고 레드라인을 넘을 경우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지 알 수 없다”면서 “북한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고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이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