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희 “前정부와 방송이 나를 인민재판했다”

지난 1987년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사건의 주범이었던 북한 공작원 김현희가 특별사면을 받은 이후에도 국내 친북좌파 세력들에게 의해 “858기 폭파사건이 북한이 저지른 것이 아니라 남한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양심선언’을 강요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민주화포럼 이동복 대표는 지난 10월 하순 김현희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직접 쓴 편지를 그의 남편으로부터 직접 전해 받았다며, 24일 편지 전문을 공개했다.

이 대표는 “김현희의 편지는 한 마디로 충격적이었다”며 “좌파 정권 10년 동안 이 나라 정권 기관과 방송 매체를 장악한 친북 좌파 세력들은 이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해 김현희와 그의 가족에게 과거 이디 아민이 지배하던 우간다에서나 있었음직한 인권유린 행위를 자행했다”고 비판했다.

이어 “그들은 국정원 ‘과거사 진상위원회’가 858기 폭파사건이 실재했던 사건이라는 결론을 내린 뒤에도 김현희에게 TV와 방송을 통해 ‘858기 폭파사건을 김정일이 지시하지는 않았다’는 내용의 ‘양심선언’을 할 것을 끈덕지게 강요했고, 이를 감당하지 못한 김현희로 하여금 어린 아들, 딸과 함께 집을 버리고 유랑생활을 선택하도록 만들었다”고 성토했다.

김현희는 편지를 통해 “이곳 남한에서 정착해 생활을 한 지도 벌써 20여년의 세월이 흘러,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로 평범한 생활을 해오고 있다”며 “저로 인해 깊은 마음이의 상처를 입은 유족들에게 심려를 끼치지 않으려고 세상과는 거리를 둔 채 하루하루를 참회하면서 조용히 살아왔다”고 심경을 밝혔다.

“그러나 5년 전인 2003년경 친북 성향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세상은 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며 “KAL기 사건의 조작설과 음모론은 그 어느 시기보도 크게 제기됐고, 방송제작진들을 저의 집을 습격하고 촬영, 방송해 노출시키는가 하면 국정원과 경찰 당국이 저와 저의 가족을 추방하는 정말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발생했다”고 억움함을 호소했다.

김현희는 이후 긴 장문의 편지를 통해 KAL기 폭파사건이 조작이 아니라는 증거와 방송사들의 편파적인 취재 행태, 지난 정부에서 이뤄졌던 ‘과거서 진상 조사위원회’의 허울뿐인 재조사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방송사들은 제가 북한 사람이라는 것을 밝힐 수 있는 장소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취재하지도 언급하지도 않았으며, 또한 KAL 사건이 북한이 소행임에도 불구하고 공작원인 저를 부정적으로 대하면서도 반대로 북한 당국을 자극하지 않고 조심스러워하는 이중적 태도를 견지했다”고 비난했다.

이어 “무고한 많은 생명을 앗아간 항공기 테러사건을 국가기관과 공영방송 기관들이 정치적으로 악용한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현희는 “KAL기 사건을 두고 볼 때, 북한은 자신의 국가존립을 위해 남한에 대해 테러사건을 일으켰고, 남한은 어떠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과거 정부를 조작설로서 무너뜨리려 했다”며 “그리하여 북한은 KAL기 폭파사건으로 남북 간의 긴장과 갈등을, 남한은 조작설로 급진적 진보와 보수 간의 남남 갈등을 초래하고 말았지만, 남북한 정보당국들이 실행했던 공작들 모두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고 역사에 길이 남을 범죄행위”라고 규탄했다.

김현희는 마지막으로 “KAL기 사건에 대한 편향된 역사 해석들을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지난정부에서 발생한 KAL기 사건 관련 조작 음모와 과거사위들의 재조사 활동은 한마디로 ‘김현희와 안기부 죽이기’ 공연이었음을 말하고 싶다”고 밝혔다.

KAL기 폭파사건은 19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가던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기가 미얀마 근해에서 북한 공작원에게 의해 공중폭파 돼 탑승했던 승객과 승무원 115명 전원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비행기에 폭탄을 설치했던 북한 공작원 2명은 바레인 공항에서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공항에서 도주를 시도했다. 체포과정에서 남성 공범 김승일은 음독 자살했고, 자살에 실패한 김현희는 체포돼 한국으로 송환됐다.

김현희는 이후 대법원에 의해 사형판결이 확정됐지만, 북한 정권에 의해 자행된 사건의 전모를 진술함으로써 특별사면 처분을 받고 국내에 거주해왔다. 그러나 이후 폭파사건 조작 시비가 끊이지 않았고, 노무현 정부 때는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를 통해 재조사가 이뤄지기도 했다.

북한은 이 사건 직후인 1988년 1월 미국에 의해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됐고, 일본과 북한간 납치자 문제를 새로운 외교 현안으로 부상시키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다음은 김현희가 쓴 편지 전문]

이동복 북한 민주화포럼 상임대표님께

지난 여름은 정말 무더웠습니다. 시월의 끝자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은 완연한 가을의 기운을 느끼게 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KAL 858기 폭파사건의 장본인인 김현희입니다. 저는 대표님을 1972년 11월 남북조절위 남측 사절단으로 평양에 오셨을 때 화동으로 참석하여 처음 뵈옵고, 서울에 와서는 대표님께서 안기부 특보로 계실 때 두 번째 뵈었습니다. 대표님과 저와는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기에 일찍이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여 송구스럽습니다.

저는 월간지나 인터넷을 통해 대표님께서 북한민주화를 위해 활동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최근 MBC ‘PD수첩’프로그램에서 방송한 광우병 사태와 관련하여 기자회견을 하시는 등 대표님의 소식을 접하고 있습니다.

-편지를 쓰게 된 동기

제가 이곳 남한에서 정착하여 생활을 한지도 벌써 20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저는 1997년 12월이 되어 그동안의 모든 사회활동을 완전히 접고 결혼하여 두 아이의 엄마로서 평범한 생활을 해왔습니다.

저는 저로 인해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은 유족들에게 심려를 끼치지 않으려고 세상과는 거리를 둔 채 하루하루를 참회하면서 조용히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5년 전인 2003년 경 친북성향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세상은 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KAL기 사건의 조작설과 음모론이 그 어느 시기 때보다 크게 제기되었고 MBC등 공영방송사들이 이에 편승하여 KAL기 사건의 실체를 부정적으로 방송하는 안타까운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저는 대표님께서 2003년 11월 MBC 교양제작국의 PD수첩 “16년간의 의혹, KAL기 폭파범 김현희의 진실” 프로그램의 최진용 책임 PD에게 보낸 편지를 읽은 사실이 있습니다.

최PD가 “장기영에게 꽃다발을 건네 준 소녀가 김현희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한 것에 대한 대표님의 정중한 반론이었습니다.

그리고 대표님께서 2007년 10월 국정원 과거사위의 KAL기 사건 조사결과 발표에 대해 ‘晩時之歎(만시지탄)’의 성어로 대신하신 글을 읽었습니다.

저는 대표님께서 저와 KAL기 사건의 실체를 입증하시는데 많은 노력을 하시는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친북좌파들은 대표님의 증언을 거부하였고, 저는 그들로 부터는 지난 정권 내내 “가짜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비난을 받아야했고, 국정원 과거사위로부터는 십수차례의 조사 요구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MBC와 SBS 등 방송제작진들은 저의 집을 습격하고 촬영․방송하여 노출시키는가하면 국정원과 경찰당국은 저와 저의 가족을 추방하는 정말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추방되어 피난생활을 여지껏 해오고 있습니다. 사건의 유일한 증인이고, 당사자인 제가 겪어야만 했던 많은 고초들과 실제 그 음모들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에 대한 저의 의견 등을 대표님께 소상히 말씀드리고 도움을 받고자 이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의혹의 사건들

2003년 10월이 되어 저의 신상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국정원의 모 직원으로부터 국정원 내부가 시끄러우니 외국으로 이민을 갈 것을 권고 받았습니다. 담당직원으로부터는 전화로 수십차례에 걸쳐 KAL기 사건에 관한 질문들을 받았습니다. 그는 저에게 뼈아픈 옛 기억들을 상기시켰습니다. 저와 관련해서 국정원 내부에 어떤 일이 전개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담당 경찰간부로부터 2년 정도 타지역에 거주해 줄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해 10월 하순경, 저의 집 현관에는 미심쩍은 두 종류의 외국산 우유가 배달되어 있었고, 그 배달물은 며칠 동안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시기 KBS 취재기자들이 저의 거주지 주변을 며칠 동안 대개하면서 취재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국정원으로부터 그들의 취재활동을 사전에 통보받은 바가 없었습니다.

그해 11월 초순경, 천주교 사제단 115명이, 일주일 뒤에는 천주교 신부 202명이 정동 성프란체스코 회관에서 KAL기사건 조작의혹을 제기하면서 전면 재조사와 당시 안무혁 부장, 이상연 차장, 정형근 수사국장 등 수사책임자에 대한 조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습니다. 16년 전의 사건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주변 상황으로 마음이 매우 어수선한 시기에 국정원 담당관으로부터 MBC PD수첩 프로그램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재차 지휘부에서 이미 결정한 사항이니 그 지시에 따를 것을 강요해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지시를 완강히 거부하였고 이것이 큰 화근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1월 중순경, 이 지시 거부 때문에 저의 남편이 호출당하여 경기도 분당 모 식당에서 국정원 담당간부와 직원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저의 공개출연은 요구하지 않겠지만, 대신 연말에 청사 내에서 천주교 신부들과 설명회를 가지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저에 대한 공개 문제는 이것으로 마무리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남편이 담당간부를 만나고 있는 바로 그 시각에, 밤을 틈타 카메라를 멘 기자 여러 명이 저의 집을 습격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다름아닌 MBC PD수첩의 취재기자들이었습니다. 저로서는 몹시 긴장하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정원이 앞에서는 태연히 저에게 거짓 약속을 하면서까지 뒤에서 공격하는 데에는 그들의 사업계획이 꽤나 절박하였나 봅니다.

MBC 기자들에게 습격당한 다음날 새벽 저는 그들에게 계속해서 시달릴 것을 생각하여 담당경찰들과 함께 그들의 눈을 피해 어린 자식들을 업고 다른 곳으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필 남편이 부재중일 때에 저의 신변에 위험스런 일이 생겼습니다.

저의 집 주변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이 갑자기 요란해졌고 며칠 뒤 이번에는 SBS 취재기자들이 저의 집 주변을 취재하고 다녔습니.

저는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만 5년 동안 제가 살던 보금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렇게 피난 생활을 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저는 가짜로 낙인되어 있었고 부도덕한 여자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신변에 관한 일련의 의심스러운 사건들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었는지 혼미스러웠지만 그 의문을 푸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KAL기 조작의혹 사태’와 맞물려서 그 의문들을 푸는 데 단초가 되었습니다.

-추방세력들

저에게 갑자기 불어닥친 일련의 이 의문스러운 사건들은 저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점점 압박하기 위한 위협의 신호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MBC 취재기자들이 습격한 다음날, 저의 임시 피난처 근처를 찾아 온 담당경찰간부는 저의 남편에게 “신문을 함부로 펴서 읽지 말고, 우유 같은 배달물은 조심해야 한다. 이번 일은 정형근 의원을 치기 위한 것이다. 모 지역에 두 달 정도 거주해 주겠는가?”라며 요구했습니다.

그는 이 정도의 정신적, 육체적 충격을 주었으니 우리가 그들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MBC 습격사건뿐만 아니라 자신의 관할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방송3사들의 취재활동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사태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돌아간 후, 제가 그들의 요구에 동의하는 고민을 하는데 필요한 며칠의 기간이 다시 흘렀습니다. 이번에는 국정원 담당관으로부터 저의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그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저를 향하여 지난번 약속과는 무관하게 MBC 방송에 출연하거나 인터뷰해줄 것을 재차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문제를 논쟁하는 과정에서 MBC의 습격사건은 바로 국정원에 의해서 저질러진 것임이 탄로나게 되었습니다.

저의 출연거부로 인하여 국정원이 오래전부터 기획하고 추진해온 사업계획에 차질이 빚어지게 된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공작원의 눈에는 그 사업이 ‘공작’ 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국정원이 경찰당국, 방송사들과 서로 연계하여 공작사업을 추진해 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를 두고 국정원은 정보관리를, 경찰당국은 보안관리를 각각 나누어 맡고 있기 때문에 저와 관련된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서 그들은 서로 공조체계를 구축하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예를 들어 방송사들이 국정원의 묵인 하에 취재하러 접근하는 것을, 경찰당국이 적ㅈ극적으로 대처하고 자기 직무에 충실했다면 일이 제대로 진행될 수가 없었다고 봅니다.

국정원이 중심이 되어서 경찰당국, 남한의 주력 방송사와 연대하여 교묘히 저와 저의 가족을 추방한 정말 서글프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 기관은 모두, 절대 서로 아무 관련이 없다고 발뺌을 할 것입니다.

저 김현희와 KAL기 사건에 대해 약속이나 한 듯이 편파방송을 하는 행태는, 그들 방송사들이 공영방송의 의무를 저버린 채 ‘우리는 정권의 선전선동매체로 전락하였다’라고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드러나는 음모들

천주교 신부들의 두 차례 대규모 기자회견은 일종의 신호탄에 불과했습니다. KAL기 사건의 ‘조작음모론’은 MBC 방송을 시작으로 하여 일제히 포문을 열었습니다. 포격의 위력은 정말 대단하였습니다. 저를 포섭하는데 실패한 국정원은 저를 포함하여 안기부를 정적으로 설정하고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집권 세력들은 군사 정권에서의 정보기관인 ‘안기부’와 탈군사 정권에서의 정보기고나인 ‘국정원’을 구분하여 확연히 다르게 인식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국정원이 자기 정체성을 망각한 채, 자신의 전신인 안기부를 공격하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배후’에서 지휘하며, 자신의 몸을 도사린 채 방송․언론매체들을 이용해 선전하게 되고, 종교․시민단체 ‘전위’ 조직들을 동원해 시위·선동케하는 등 여러 전술을 펴나갔습니다.

저는 그들로부터 추방당한 상태에서 의혹과 위협들이 빗발치는 자욱한 포화 속을 벗어나려고 안간 힘을 썼습니다.

방송3사들은 사건 16주기를 전후로 해서 MBC는 ‘PD수첩’ 프로그램에서, SBS는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KBS는 2부작 ‘일요 스페셜’에서 ‘김현희, 그는 누구인가’, ‘16년간의 의혹과 진실’, ‘김현희와 김승일 의문의 행적’등의 제목으로 저 김현희의 공작행적을 중심으로 취재해 방송했습니다.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방송3사 제작진들이었습니다. 의문을 제기한 사항들은 임 조사가 되어 자기들의 방송 뉴스나 언론을 통해 보도되거나, 국정원이 그것들의 조사 결과를 자료로 보관중인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저의 해외 공작 행적을 추적, 취재하면서 마치 새롭게 발견한 엄청난 사실처럼 이제 와서 호들갑을 떨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들 제작진들은 이미 재조사된 사실들인 줄 모르는 듯 의혹 사항들을 열심히 취재하고 방송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제가 그들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하였더라면, 영락없이 저는 ‘가짜’로 내몰렸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MBC와 SBS는 저의 출연 거부를 못마땅히 여겼는지 저의 거주지 주민들을 인터뷰하고 저의 거주지를 촬영해 노출시켜 버렸습니다.

국정원이 저를 추방하면서까지 방송사들을 지원한 프로그램이 저 ‘김현희와 안기부 죽이기’였다는 사실에 더 이상 말문이 막혀 할 말을 잃었습니다.

MBC의 방송이 나간 다음 날(11/19)에 이를 확인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담당 경찰간부가 찾아와 저에게 방송을 시청한 소감을 물었습니다. 정말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그의 파렴치한 행동에 저는 참을 수 없어 “죽여주세요”라고 소리쳤고, 그는 그렇게 알고 상부에 보고하겠다며 황급히 돌아갔습니다.

경찰당국은 며칠전 MBC 취재기자들의 습격을 피해 저를 새벽 3시에 피신시켜 놓고서는 이제 와서 그들 방송 소감을 물어보러 왔다는 사실에서 그들의 뻔뻔스러움과 이중적 처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저를 피신시킨 것은 그들의 미리 계획된 추방행위였던 것입니다.

국정원과 경찰당국은, 제가 어린 자식들이 있으니 얼마 버티지 못하고 항복할 것이라고 확신했는지 서로 번갈아 가면서 저를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국가기관들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보다도 법을 엄격히 준수하고 집행해야 할 그들의 반이성적 행위는 스스로 국가기관임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로부터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감시를 당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국정원과 경찰당국, 두 공안당국과 서로 초긴장 상태로 대치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음모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방송사들의 연계혐의

저는 현재까지 국정원과 서로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 담당관으로부터 “우리는 KAL기 사건 16주년을 맞아 방송사들의 기획 특집방송에 지원을 하였을 뿐이다”라는 변명을 들었습니다.

그들 방송사로부터 ‘가짜’로 내몰린 피해 당사자인 저의 입장에서 보면, 국정원은 지원 수준을 넘어서 어떠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기획하였고, MBC를 포함한 방송3사가 그 지원을 받아 제작․편집하는 등 서로 연계하여 공모한 것이 분명해보였습니다.

국정원이 방송사들과 연계하여 공모한 이유로는 첫째, 방송사들이 적게는 수개월 많게는 1년 가까이 많은 인적·물적 지원을 투자하여 제작 편집한 방송 프로그램들이 한결같이 사건 조작의혹을 다루는 내용으로 편파적 방송을 하였다는 점입니다. 남한을 대표하는 공영방송들임에도 불구하고, 편향되지 않고 공정하게 제작 방송을 하였다고는 도저히 볼 수가 없었습니다.

국정원이 지원했다는 결과가 약속이나 한듯이 ‘안기부 수사가 엉터리였다, 김현희는 거짓말을 하였다’고 성토하는 특집 방송이었습니다. 정말 국정원은 방송사들이 제작 편집한 프로그램의 내용을 송출하기 이전에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요. 방송사들이 정보기관의 수사 의혹을 신랄하게 비판 보도하고 있는데 국정원이 중단 요구도 없이 이를 계속해서 지원했다는 것이 저로서는 납득할 수가 없었습니다.

둘째로, 방송사들의 조작 의혹제기에 대해 국정원은 매우 소극적인 태도로 대응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국정원은 저 김현희와 KAL기 사건에 관련해 방대한 양의 수사 및 정보자료들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원 국내 담당 차장인 박정삼은 ‘KAL기 사건이 남북 대결시대, 냉전시대의 유물이었다’는 애매모호한 말만 했습니다. 방송사들이 제기하고 있는 케케묵은 의혹들에 대해 국정원은 모르는 척하고 그 수사한 자료들을 일부러 제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도대체 국정원이 무엇을 지원했다는 것인지 저로서는 알 수가 없었고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MBC에 출연한 박정삼은 진실게임의 한 편에 서서 그 진실게임을 즐기면서 KAL기 사건 조작 의혹을 조정하는 실질적인 기획자였습니다. 그리하여 방송사들은 저와 KAL기 사건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였던 것입니다.

셋째, 방송사들은 KAL기 조작 의혹제기와 함께 저의 거주지를 촬영하고 방송하여 노출시켜버렸습니다. MBC는 저의 거주지를 습격하고 나서 그곳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노출까지 해버렸습니다. SBS도 이에 질세라 며칠 수 또다시 노출시켜 버렸습니다.

방송사들은 제가 자신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고 해서 힘없는 죄인을 함부로 길거리로 내동댕이칠 수가 있는 것입니까. 국정원은 방송사들이 무모한 행위를 그저 바라보고 침묵했습니다. 그들을 제재하거나 항의하고 조사하였다는 말을 저는 지금껏 듣지 못했습니다.

이러고도 국정원은 방송사들과 공모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정말 참담한 심정입니다.

넷째, 방송사들이 사건 당시의 검차로가 안기부 수사 책임자들에 대해 취재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방송사들은 사건에 대한 각종 의혹을 제기만 하였지 그런 의혹들을 가장 빠르고 효율적이고, 경제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해당사건수사의 전문가이자 책임자들인 그들을 제외하였습니다. 그리고 유족들의 절규장면과 인터뷰 장면을 계속 방송하여 시청자들의 감정을 자극시키는 등 감성에 호소하였습니다.

방송사들은 의도적으로 그들을 취재 대상에서 제외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그것은 방송사들이 오히려 그들에게서 사건 취재 의도에 대해 의심을 받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국정원 지휘부는 그 점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후임자들이 전임자들을 조사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조사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방송사 제작진들이 수사 전문가들을 취재하여 사건의혹 해소가 되어버린다면 그들의 ‘의혹 부풀리기’ 특집 방송을 할 수가 없었겠지요.

마지막으로, 국정원과 방송사들은 의심에 찬 눈초리로 힘없는 저만 몰아세우려 했습니다. 제가 안기부 재직시 북한 소식을 전해주는 프로그램인 MBC ‘통일 전망대’와 KBS의 ‘남북의 창’에 수시로 출연하여 북한 실상정보를 제공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 당시 방송사의 북한국은 시작 초기여서 지금과 달리 북한관련 정보가 빈약한 상태였습니다.

제가 북한에서 태어나 생활하지 않았다면 방송사에서 북한 사회의 실상을 어떻게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북한국은 교양제작국의 조작설 수준의 의혹제기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두 방송사의 교양제작국은 제가 북한인이라는 것조차 의혹의 눈길로 보았습니다. 방송사들은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 독약 앰플을 깨물지도 않은 부도덕한 여자’라고 맹비난을 하며 저를 아주 부정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것이 저에 대한 특집방송의 결론이었습니다.

덩치가 큰 방송사들이 저 하나를 두고 으르렁대는 모습이 참으로 딱하게 보였습니다. 방송을 하는 동안, 국정원과 방송사 제작진들은 방송화면 뒤에서 연약한 저를 두고, 저와 시청자들을 비웃고 조롱하면서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저는, 역사는 이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반드시 응징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고한 많은 생명을 앗아간 항공기 테러사건을 국가기관과 공영방송 기관들이 정치적으로 악용한 것에 대해 그들은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방송사들의 문제점

MBC, SBS, KBS 등 방송3사의 제작진들은 1988년 1월 안기부의 수사결과발표문에 초점을 맞추어 취재하고 의혹을 제기하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수사발표 이후에 초동수사에서의 실수나 미흡한 사항에 대해 계속 조사하여 언론에 보도된 자료들을 외면하고 무시했습니다. 방송사들은 안기부가 발표한 저의 부 김원석이 1987년 당시 앙골라 주재 북한무역 대표부의 수산대표로 근무하고 있었다는 것이 완전한 거짓으로 밝혀졌다고 방송했습니다.

그러나 콩고주재 북한 대사관 일등 서기관으로 근무하다가 1995년 3월 귀순한 고영환씨는 “당시 김원석씨는 대외경제 사업부 앙골라 기술협조단 대표로 있었다”면서 “당시로서는 외교관은 아니었지만 정부관리였다”고 월간조선 2001년 11월호에서 말했습니다.

과연 방송사들은 이 기사를 본 사실이 없는 것일까요. 그리고 저의 아버지가 쿠바 외교관으로 재직하였다는 사실 증거자료가 있는데도 국정원은 그들에게 그 자료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서 일까요.

둘째, 방송사들은 제가 북한사람이라는 것을 밝힐 수 있는 장소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취재하지도 언급하지도 않았습니다.

수사결과 발표 자료에 사진이 크게 붙여져 있는 저의 해외실습 장소인 마카오의 거주지와 거주생활, 중국․광주의 거주지에 대해서 방송3사가 똑같이 간과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시아의 가까운 곳을 두고 멀리 유럽과 중동지역에까지 가서 저의 행적을 취재하는데 많은 시간과 경비를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셋째, 방송사들은 어떤 사항에 대해, 사실과 일치하는 부분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을 전체적으로 이야기하고 나서 일치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의혹제기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분 오류를 범하였고 그 오류를 무시하면서까지 문제제기를 하였습니다.

방송사들은 암호 수첩에 기재된 부다페스트의 연락처 번호와 베오그라드 북한 대사관 번호 2개가 유치원, 화학공장이라며 의혹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확인된 2개의 연락처 번호인 비엔나 소재 북한 대사관과 베오그라드 소재 공작원 아지트의 번호에 대해서도 언급해야했습니다. 4개의 전화번호 중 2개는 맞고, 2개는 일치하지 않음을 시청자들에게 이해시켜야 했습니다. 시청자들은 일치하는 2개의 전화번호를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넷째, 방송사들은 사건의 사실 내용을 이해하려하지 않고 형식적이거나 2차적인 문제를 꼬투리 잡아 의혹제기를 하면서 내용 전체를 부정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공작 임무를 부여받고 “적후로 떠나면서 다진 맹세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무시한 채, 내용 중 ‘규율’의 철자를 끄집어내어 북한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며 의혹을 제기하였고 다음날 모 조간신문에 ‘규률’로 수정되어 나왔으니 조작되었다며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고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가 공작원 교육 시 ‘이남화’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을 전혀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이남화’ 교육은 남한에 침투하여 임무 수행을 위해서 공작원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학습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 충성 맹세문은 제가 남한의 조사실에서 남한 철자법에 따라 진술하여 ‘규율’이 된 것입니다. 철자를 바꾸어 썼다고 해도 저로서는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의혹 제기자들은 ‘규율’ 철자 때문에 ‘충성 맹세문’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 동북리 초대소에서 맹세문을 낭독하였습니다.

그리고 방송사들은 화동 사진의 귀를 문제삼아 물고 늘어지며 제가 1972년 11월 남북조절회담시 평양근교 역포에 임시로 마련된 착륙장에 화동으로 참석하였다는 진술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부여받았던 아버지의 직업 등 주변상황에 관한 자료들도 국정원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그 자리에 분명히 있었습니다. 저의 화동 참석 진술이 먼저였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2차적으로 수사관들이 사진을 구해왔습니다. 그 후 일본에서 저의 진술을 뒷받침하는 사진들이 입수되어 보도되었는데, 그들은 그 사진들을 절대 방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희선’이라는 북한 여성이 나오는 조총련 촬영 자료를 상세히 방송하였습니다.

다섯째, 방송사들은 사건 의혹제기를 하면서 사건 관련국인 일본, 미국, 북한 등에 대해서 외교적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는 사항은 취재, 방송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제가 초대소에서 일본어 교육을 받을 때 함께 생활한 ‘이은혜’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함구하고 외면했습니다. 제가 진술한 이은혜 선생이 ‘다구치 아에코(田口八重子)’와 동일한 인물임을 일본 경시청이 밝혀냈기 때문에 그들이 동일한 인물이 아니라고 의혹제기 방송을 한다면 외교적 문제로 도전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들은 수사 발표 후 곧바로 북한을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한 미국에 대해서는 비난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방송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미국과 일본의 개입을 두려워했다고 봅니다.

또한 방송사들은 KAL기 사건이 북한의 소행임에도 불구하고 공작원인 저를 부정적으로 대하면서도 반대로 북한 당국을 자극하지 않고 조심스러워하는 이중적 태도를 견지하였습니다. 심지어 KBS 류지열 담당PD는 ‘김현희는 평양을 출발하지 않았다’고 까지 주장했습니다. 그는 저의 위조 여권을 위조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의 방송 의도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문제점은 방송사들이 KAL기 사건 조작 의혹을 제기하면서 사실과 다르다고만 말했지 실체적 진실에는 전혀 접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방송 제목과 동떨어져서 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김현희는 누구인가’라고 열심히 해외를 전전긍긍하며 저의 행적을 추적하여 취재하면서도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저를 외계인 수준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저는 그 점이 미스테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KBS는 2005년 새해 신년특집으로 해방60년을 맞아 ‘10대 미스테리 사건’ 항목에서 KAL기 폭파사건이 3위를 차지했다고 스스로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전위’조직과 탄원서 제출

MBC가 KAL기 사건 조작 의혹을 방송한 지 나흘만인 2003년 11월22일 경, 국정원 수사 국장 등 5명은 소설 ‘배후’의 저자 서현필과 ‘창해’ 출판인 전형배를 상대로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민․형사 고소를 하였습니다.

그해 12월 초순경에는 언론에 제가 신변노출을 꺼려 가족과 함께 갑자기 잠적하였다는 기사들이 보도되었습니다.

그해 12월 중순경, 이 소문을 놓칠세라 ‘KAL기 가족회(회장 차옥정)’와 ‘KAL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위원장 김병상 신부)’가 “최근 갑자기 사라진 전 북한 공작원 김현희씨를 29만원에 현상수배한다”면서 시위와 함께 수배 전단지를 뿌리고 다녔습니다.

또한 이들 단체는 전두환 전 대통령 집 앞,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당사 앞, 국회, 검찰청, 인천국제공항 KAL 사무실, 국정원 앞 등지에서 시위와 기자회견, 세미나 등을 하여 사건 조작 의혹을 제기하고 전방위로 활발한 행동을 전개해 왔습니다.

KAL기 사건 조작설이 방송․언론 등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확산되는 가운데 ‘배후’(서현필저, 창해출판), ‘KAL858, 무너진 수사발표’(신동진저, 창해출판), ‘나는 검증한다, 김현희 파괴공작’(노다 미네오저, 창해출판) 등 책들이 이 시기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KAL기 음모론을 중심으로 해서 여러 형태로 전개된 것입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위 ‘대책위’에 소속된 자들에 의해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소송, 저작, 출판, 시위, 기자회견 등 일련의 사건에는 ‘대책위’소속인원들이 항시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른바 국정원의 ‘전위’조직이었습니다.

‘KAL기 사건 가족회’는 회장 차옥정 등 몇 명의 유족과 신동진(가족회 사무국장, 작가, 국정원 과거사위 조사관) 등 조작 의혹제기를 위해 구성된 조직으로 순수 유족회와는 다릅니다. ‘대책위’는 국정원이라는 국가기관의 후광을 업고 KAL기 사건을 진상규명하라고 외치면서도 사실은 조작 의혹 부풀리기를 하는 여러 단체가 모여서 결성된 정치성향의 시민단체입니다.

위 ‘대책위’는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법원에 사건 관련 정보공개 청구를 하고, 자작극과 저를 가짜라고 하루가 멀게 맹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들 사이트는 매우 위험한 수준인데도 공안당국은 내버려두고 있습니다.

‘KAL858, 무너진 수사발표’를 쓴 신동진은 ‘KAL 가족회’, ‘대책위’ 사무국장으로 일을 하다가 ‘국정원 과거사위’ 조사관으로 3년간 채용, 근무하였는데 이 사실이 국정원과 ‘대책위’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국정원이 소송청구한 명예훼손 사건은 서로 연계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국정원이 ‘대책위’의 서현필과 전형배를 고소한 사실은 검찰과 사법당국을 속이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저는 최근(8월초) 검찰과 사법당국에 편지 형식으로 탄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절차법상 아무런 하자가 없어보이지만, 국정원이 검찰과 사법당국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부당한 공권력 행사를 한 사건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이 소송사건에서 피고인 서현필(소설가)과 전형배(출판인) 외에 변호를 맡은 변호인 심재환도 위 ‘대책위’의 위원입니다. 그래서 이 소송사건은 너무도 계획적인 사건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의 탄원서 제출 때문인지 선고 재판이 한 달 가량 연기되었다가 지난 9월 초순경 소송건이 무혐의 처리되었고, 국정원은 패소당했습니다. 피고인들에게 2년 구형을 내린 검찰은 이에 불복하여 얼마 전인 9월 중순경 항소장을 제출하였습니다. (서울중앙지법 2008 노 3194)

“(P33 접혀서 보이지 않는 부분) 소설 내용이 진실이 아닌 의혹을 (접혀서 보이지 않는 부분) 고, 내용이나 표현이 수사 결과에 배치되는 점이 있더라도 이것만으로 당시 수사를 맡았던 직원들을 비방하거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해 책을 펴낸 것으로 볼 수는 없다”고 밝히면서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판결문에는 저의 탄원서 내용이 참고된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무죄선고가 사법당국의 명예에 흠집을 낸 사항에 대해서는 인내하겠다는 재판부의 의사표시로도 보였습니다.

한편, 저는 이 소송사건을 통해 KAL기 조작설의 음모가 어느 정도 소문이라도 나주길 바랐지만 아직까지 잠잠한 것을 보니, 저의 탄원서 제출 노력은 그다지 효력이 없었다고 여겨집니다. 제가 국정원, 검찰, 법원 등 국가 기관에 저의 진정을 호소한 것이 처음부터 잘못된 시도였는가요.

-국정원 과거사 발전위원회

국정원 과거사 발전위(위원장 오충일)는 2005년 2월 초순 KAL858기 폭파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 등 우선 조사대상 7건을 선정, 발표하였습니다.

‘발전위’는 그때부터 1007년 10월 하순경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해체되기 전까지의 3년동안, 저에게 사건의 당사자로서 조사받을 것을 십수차례나 요구해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발전위’의 요구를 모두 거절했습니다.

제가 그들의 조사요구를 거절한 이유는 제가 국정원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위 ‘발전위’에 피조사자로 출석하게 된다면, 국정원이 그동안 저지를 과오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꼴이 되고, 위 ‘발전위’로부터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부합한 방향으로 사실을 왜곡시키거나 또는 강압적 진술을 해야만 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국정원이 ‘배후’에서 자신의 정도를 훨씬 넘는 공권력 남용 행위를 결코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국정원은 자신의 내부에 조직되어 있는 ‘발전위’를 이용하여 저를 끌어들여 조사하는 과정에서 회유와 협박을 번갈아가며 하겠지요.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국정원으로부터 그것을 견디어내는 일이 무척 고통스럽고 힘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발전위’의 오충일 위원장을 비롯하여 안병욱 교수, 한흥구 교수, 박용일 변호사, 이창호 교수 등 민간 조사위원들 10명은 대부분 정보기관의 피해자이면서 자기 방식의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는 진보성향의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어, 그들의 조사에 응하는 자체가 KAL기 사건의 근본이 훼손될 것 같아 조사에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위 ‘발전위’가 KAL기 사건을 우선 조사대상으로 선정한 이상, 조사 결과를 발표해야만 하는데 저의 조사 없이 과연 어떻게 발표하는지 매우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역사를 자기 방식으로 재단하려는 ‘발전위’의 사건 재조사 결과 또한, 역사에 남게 될 것이고 후일 그들 역시 역사의 비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 ‘발전위’는 2006년 8월초 KAL기 사건 조사 중간발표를 하고 그해 연말 결과 발표를 할 예정이었으나 다음해인 2007년 10월 초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나서 10월 하순에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해체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김현희는 북한 공작원이다’, ‘무지개 공작문건이 발견되었다’라는 정도의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들은 사건 당시 지휘부와 당사자인 저 김현희를 조사하지 않고도 결론을 내렸습니다. 북한에 대한 사과, 권고 한마디 없이, 그리고 힘없는 여자 하나도 조사하지 못하는 위원회였던 것입니다. ‘발전위’의 권위는 그것으로 땅에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오충일 위원장은 KAL기 사건을 조사하는 핵심은 ‘김정일이가 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혀내는 것이다’라고 말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사위원 이창호 교수도 결과 발표 후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이다’라는 것과 ‘김정일이가 지시를 내렸다’는 것은 별개의 사항으로 학계에서 정설로 되어있다면서 사건의 실체에 흠집을 내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고한 민간인의 생명을 앗아간 항공기 테러 사건을 누가 지시했는지 스스로 밝혀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김정일을 옹호하려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해야만 했습니다.

방송사들이 제가 공작임무를 맡고 떠나기 전 낭독한 ‘적후로 떠나면서 다진 맹세문’을 조작 의혹의 기본 항목에 넣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지개 공작’문건을 공개한 국정원의 행동은 정말 이상했습니다. 인터넷 신문 ‘통일 뉴스’의 요청에 의해서 국정원이 공개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국정원은 ‘무지개 공작’ 문건이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통일 뉴스’에 문건을 제공하고 공개하도록 하는 아주 친절한 정보기관이었습니다. 그리고 비밀로 분류되지 않은 공작 문건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저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

2006년 8월 초순경, 국정원 과거사위가 저를 조사하지 못한 채 중간 조사 발표를 한 후, 이창호 위원은 법적 권한이 있는 진실화해위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압박을 가해서라도 저를 조사하겠다고 하였습니다.

2006년 11월 중순경, KAL기 가족회는 ‘진실화해위’에 재조사를 신청하였고, 다음해인 2007년 7월 중순 ‘진실화해위’는 사건 조사 개시를 결정하였습니다.

2006년 12월 초, 송기인 위원장은 KBS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유족들이 우리에게 국정원 과거사위의 조사 결과가 미흡하다고 하여 신청을 하였다고 동행명령권은 있지만, 김현희를 조사할 수 없다면 강제적으로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이 필요하여 국회에 강제구인 법안을 제안하였는데 아직 법사위에 상정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

2007년 12월 초, 안병욱 신임위원장은 “진실을 밝혀야 하지만, 어떤 것은 적당히 덮어둬야 한다”면서 KAL기 사건 재조사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국정원 과거사위 위원재직 시절 ‘KAL기 사건은 안기부 조작이 아니다’라고 중간 조사결과를 발표해 시민단체로부터 맹렬한 비판과 수모를 당한 사실이 있습니다.

최근 국정원 지휘부에 저의 편지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담당 직원들로부터 “진실화해위에서 저를 조사하려고 하고 있다. 소재지를 알려달라고 하는 것을 버티고 있다”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

국정원은 저에 대해 국정원 과거사위의 조사가 실패로 끝나자 이번에는 ‘진실화해위’를 통해 끝까지 조사받게 하여 저를 궁지로 계속 내몰려고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국정원이 지난 정권에서 저지른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위원회를 통해 면해 보려는 술책으로도 보입니다. 그리고 제가 조사받고 공개된 자리에서, 건재한 그들 세력들이 저에 대해 신변 위협을 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깔려있다고 생각됩니다.

KAL기 사건이 국가기관인 ‘진실화해위’에 신청되어 조사를 하고, 그 결과 발표를 하기 전까지는 KAL기 ‘조작의혹사태’는 끝나지 않고 계속 진행될 것이고, 저는 국정권과 여전히 긴장관계를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수사국장의 방문

제가 국정원과 적대적 관계를 수년 동안 유지해 오던 중, 김만복 원장의 서신을 두차례 거절하자, 2007년 2월 하순경 국정원 이모 수사국장과 직원들이 저를 방문하였습니다.

수사국장은 저를 대신하여 저의 남편에게 “‘발전위’에서 KAL기 사건에 대해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발전위’가 이 사건을 마무리해서 ‘진실화해위’(당시 송기인 위원장)로 관련 서류를 넘기면 ‘진실 화해위’는 그 테두리 안에서 조사하고 발표할 것이다. 만약 김현희가 ‘발전위’의 조사에 응하지 않으면 ‘진실화해위’에서 법원 구인장을 발급받아 강제연해앟여 조사받게 할 것이다. 김현희를 면담하고 조사하려는데 응해달라”라며 방문목적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남편은 그의 요구를 거절하고 나서 “우리가 국정원 때문에 제 집에서 쫒겨나 고생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김현희는 가짜’라는 책을 쓰고도 조사관으로 채용한 신동진과 대학에서 강연하고 돌아다니는 서현필을 뻔히 보고도 수사하지 않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리고 ‘가족회’ 회장 차옥정과 ‘대책위’ 집행위원장 신성국 신부는 ‘김현희는 안기부 공작원이다’며 전국을 시위하고 돌아다니느데 왜 수사하지 않는가요”라고 항변하였습니다.

저의 남편이 계속해서 “지금 북한 핵 때문에 6자회담이 열리고 어느 정도 합의가 도출되고, 성과가 가시화되면서 북미관계 개선을 위해 미국이 테러지원국 해제 의사를 최근 표명하고 있는 줄 압니다.

그런데 남한에서는 KAL기 사건은 자작극이라고 외쳐대고 있으니, 미국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북한도 테러지원국 해제를 요청한 마당에 남한에서 발목 잡는 이상한 주장을 선동하고 있으면 북한이 어떻게 남한을 생각하겠습니까. 또한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는 줄 압니다. KAL기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남한은 피해를 준 북한에 사과없이 퍼주기만 하고 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시 북한에 정식으로 이 문제에 대한 사과 요청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남북 상호간에 회담의 진정성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 기회에 국정원이 자신의 과오에서 벗어나려면 북한에게서 사과를 받아내세요”라고 정상회담 관련하여 이야기하면서 수사국장에게 도리어 요청을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저의 남편이 “지금 김현희는 남북한 양쪽으로부터 내몰리고 있지만 그것보다도 일본의 접근이 더 심각할 수 있습니다. 일본은 납치 문제로 6자회담에 소극적인데 김현희를 어떻게 하든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은혜의 아들과의 만남을 통해 일본도 자기의 입지를 높이려고 하는 노력들이 남북관계에 어떤 작용이나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합니다”라고 사건 관련 국외문제를 말하자 수사국장은 수긍을 하는 듯 하였습니다.

또한 과거사위원회에 관하여 저의 남편이 “YS정부 때에도 ‘역사세우기’를 하면서 시그러웠고, 지금은 각종 과거사위원회를 만들어 역사세우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역사란 권력으로 쓰는 것이다’라고 빋고 있겠지만, 정권이 바뀌면 그 사건에 대한 역사비판이 또한 따를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지금 과거사위원회들은 ‘진실’, ‘화해’, ‘발전’이라는 말을 내세우고 역사비판을 하고 있는 것입니. 그리고 국정원이 그 위원회들을 대신하여 우리에게 전달자 역할을 하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김현희에 대해 지난 사법부가 3심한 것을 이번 ‘발전위’가 4심을 하고, 이어서 ‘화해위’가 5심을 하는 행휘, 이것이 인민재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김현희는 언제가지 재판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까”라고 강한 어조로 국장에게 말하자 그는 당황하면서 “인민재판이라고까지 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나도 조직원에 불과하다. 그럼 오충일 위원장에게 들은 사항들을 보고하겠다”고 말하고 황급히 돌아간 사실이 있습니다.

그해 10월초,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렸지만 남한당국은 KAL기 사건에 대해서 북한에 일절 거론하지 못하였습니다.

– 국정원의 이중전술

저는 국정원이 배후에서 이중잣대를 가지고 겉으로는 정보기관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안으로는 실제 겉과는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첫째, 국정원의 이중전술은 일관성이 결여된 행동들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상연 전 부장님께서는 2004년 6월초, 전직 안기부장들과 함께 고영구 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KAL기 문제에 대해 합법적 절차를 거쳐 재조사 요청이 오면 적극적으로 응할 용의도 있다는 고영구 원장의 확고한 입장을 듣고, 당시의 수사책임자로서 마음이 든든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고영구 원장은 그해 7월초, 국회정보위에 참석하여 KAL기 사건에 대한 재조사 논란에 대해 “대법원 판결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고, 이는 확고한 입장이다. KAL기 사건은 의문사 조사위들을 통해 조사할 사건에 해당되지 않는다”라고 재차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해 8월 중순, 고영구 원장은 참여연대를 비롯하여 인권운동사랑방, 민중연대, 민가협, 민변 등 7개 인권·시민단체 관련자들과 시내 모 호텔에서 극비리에 회동을 갖고 ‘국정원 과거사발전위’의 구성과 운영에 대해 의견을 타진하면서, KAL기 사건등 관련 자료들을 제출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조직수장으로서 곁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언사와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국정원장으로 취임하기 전 재야시절, 민변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KAL기 사건 대책위원회’에 활동한 사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김현희 사건의 조작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고 하면서도, 국정원 과거사위가 7대 우선조사 대상에 선정하도록 방치해 둔 이유를 설명해야만 했습니다. 국정원 과거사위는 그가 소집해서 구성한 조직이 아니던가요.

그리고 박정삼 1차장은 일간지 ‘굿데이’신문 발행인으로 재직하면서 2001년 9월 창간호에 제가 타고 있던 차량을 습격한 사진을 1면에 크게 실은 사실이 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뒤, 얼마 되지 않아 KAL기 사건 조작 의혹제기가 방송과 언론을 통해 다시 고개를 든 적이 있습니다.

결국 참여정부는 국정원장과 차장 등 지휘부에 KAL기 사건과 관련된 자들을 정권 수립부터 임명하여, KAL기 사건을 정부 정책의 일환으로 사용하려 한 것 같습니다. 정보 운영권자인 그들은 임명 초기부터 KAL기 사건과 관련해 실질적인 정보운영방향을 깊이있게 논의했다고 생각됩니다.

둘째, 수사정보자료 제공 측면에서 살펴보면, 방송3사가 특집으로 KAL기 사건 조작의혹을 제기하면서, 저 김현희와 안기부를 비난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는데도 불구하고 국정원이 관련 자료들을 제공하고 지원했다는 사실에 그 지휘부이 이중적 의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국정원은 MBC와 SBS 제작진들에게는 사진·영상자료·증거물 등 기본 수사자료들을 제공하였지만, KBS 제작진들에게는 김승일 신원관련자료, 여권에 찍혀있는 스탬프 위조 여부 자료 등 새로운 수사 정보자료들을 제공하여 제작물이 2부작으로 방영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2004년 3월 하순경, 일본 니혼TV 계열 ‘뉴스플러스1’이 KAL기 사건과 관련하여 특집 “김현희 17년간의 진실”이란 제목으로 이틀 동안 방영하였는데, 이 프로그램은 담당수사관이 밝히는 극비수사자료라고 하면서 납북 일본어선생 이은혜와 같이 생활하였던 초대소 주변 환경도, 초대소 내부 구조 등 제가 작성하였던 상세한 도표들을 공개하였습니다.

국정원이 국내 방송사들에게 제공하였던 수사정보 자료들하고는 정보 수준이 매우 다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만약 국정원이 그 자들을 국내 방송사에 제공하여 방영하게 했다면 KAL기 사건 조작 의혹설은 금방 수그러들게 되겠지요.

국내 방송사들은 이은혜 관련 의혹제기는 한결같이 하지 않고 사건을 방영하였으나, 일본 방송사는 이은혜를 중심으로 국정원으로부터 고급 정보를 제공받아 방영하였습니다. 이것이 국정원의 자료제공에 대한 이중전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국정원이 소설가와 출판인을 상대로 한 명예훼손 소송사건입니다. 국정원은 KAL기 사건 조작 의혹을 여론 조성하는 홍보 차원에서 거짓 소송 사건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국정원은 처음부터 명예훼손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봅니다. 소설보다 더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KBS 등 방송3사에 대해서는 고소를 하지 않았습니다. 기획 지원을 한 국정원으로서는 방송사들을 고소할 수가 없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국정원은 소설 ‘배후’를 쓴 서현필은 고소하고, 책표지에 ‘안기부 수사 발표는 대국민 사기극이다’라며 비소설 ‘KAL858, 무너진 수사발표’를 쓴 신동진은 고소하기는커녕 국정원 과거사위의 조사관으로 채용하였습니다. 이 또한 국정원의 불공평한 이중처사가 아닌가요.

넷째로, 2006년 4월초, 일본 도쿄 시티호텔에서 국정원 과거사위 위원 이창호, 조사관 신동진, 국정원 직원 간주되는 통역인 등이 조총련계와도 친분이 있는 작가 노다미네오를 접촉한 사실이 있다고 합니다. 국정원이 그의 책을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고, 국익 위배라고 하여 입국 금지조치를 내린 자를 찾아가 접촉하여 사건 관련 얘기를 나누었다는 사실은, 정보기관 소속 위원으로서 매우 위험스런 이중적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짓 명예훼손 소송사건을 청구하고, 편파방송을 하는 방송3사를 지원하고, 입국금지된 일본인 작가를 접촉하는 이러한 국정원의 이중적 행동과 전술은 그 자신이 ‘배후’라는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음모의 배경

국정원이 KAL기 조작의혹 사태를 기획 공작하고 음모를 꾸민 배경에는 참여정부의 정치이념과 연관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KAL기 사건이 발생한 후, 이 사건으로 미국이 북한에 테러지원국을 지정하자,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더욱 고립화되었고 남한 내 반미친북 세력에게는 테러만행규탄 시위 속에서 큰 타격을 받았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어느 때보다 반미·친북의 색채가 짙은 참여정부가 들어서자 상황이 역전되어 그들의 정치적 반대 세력인 친미·반북세력을 몰아내고 자신의 정치동조 세력들을 활성화하면서 북한 정권과는 서로 친숙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참여정부는 KAL기 사건을 지난 과거 정부 때와 다르게 다른 시각에서 각색하여 심도있게 이요하려 했다고 봅니다. 친북 정부는 KAL기 사건으로 16년간 족쇄를 차고 있는 북한에 대하여 그 족쇄를 풀어주고 관계 개선을 하는 동시에, 국내 정치세력 구도를 변화시키는 데는 과거사들 중 해당 사건은 KAL기 사건이 가장 좋은 소재거리라고 여겨졌나 봅니다.

KAL기 사건의 모든 수사정보 자료들을 움켜쥐고 있는 국정원이 자신들의 정체는 꼭꼭 숨긴채, 안기부 수사결과 발표문을 재구성하여 진실게임을 펼치는 기발한 기획공작을 꾸몄다고 봅니다.

이 공작 음모는 인적·물적 규모면에서나 사태를 전개하는 조직들의 형태 측면에서 볼 때, 단순한 기존의 의혹제기 차원이 아니라 대규모적이고 체계적인 것으로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집권 세력은 자신들이 민주화세력임을 자처하면서도, 반민주화 세력으로 간주한 군사정권에 대해서는 피해의식과 증오심이 높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들이 군사정권을 포함한 과거 기득권층ㄷ을 반민족·반민중 세력 내지는 친미·반북세력으로 규정하는 성급함에서 그들이 급진적 이념주의자들이고 편협한 민족주의자들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송기인 신무, 오충일 목사, 안병욱 교수들은, 그 기득권 세력이야말로 민중과 함께 어우러지는 대동사회를 이룩하는데 방ㄹ해되는 세력이라고 그 인식을 같이 하면서, 과거를 청산하겠다고 진실화해위와 국정원 과거사위의 위원장으로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과거사 조사는 친일·친미·반북세력들에 의해 피해받았다고 간주되는 자들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구제해 주려는 작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러한 과거 청산 작업을 통해 집권 세력은 오래도록 정권을 유지하고 ‘미래사회’를 장악하려 했습니다.

또한 집권세력은 KAL기 사건을 국가공권력에 의한 의문사로 규정하여, 이미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은 사건이고 국정원 과거사위에서 조사가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또 진실화해위에서 이중으로 재조사를 받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사건의 실체가 명백한 사건을 국가공권력으로 계속하여 재조사를 실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저와 KAL기 사건은 ‘인민재판’의 대상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실화해위가 대법원보다 더 위에 군림하는 조사기관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과거사위들이 저를 끝까지 조사하고 말겠다는 의사표시야말로 저를 음해하려는 일종의 음모로 간주하고 싶습니다.

물론 국정원은 그들의 정치 이념에 의거한 정책들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국정원은 자의든 타의든 반미·친북 이념주의자들과 음성적으로 연대하여 KAL기 사건 음모론을 증폭시키는 기획사업을 추진했다고 생각합니다.

국정원의 전위 조직들이 KAL기 조작의혹사태를 전개함에 있어 과거지향적이고, 연대하기를 좋아하고, 민중을 동원하고, 행동실천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이 단순히 의혹제기자들이 아니라 전형적인 이념주의자들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지휘부에 통보

새 정부가 들어선 지 5개월이 흐른 지난 7월 하순경, 저는 국정원장 등 지휘부에 몇 차례 편지를 썼습니다.

저는 참여정부에서 일어난 일련의 KAL기 사건 조작 의혹사태들은 국정원이 그 ‘배후’에서 부당한 공권력을 행사하여 자신의 전신인 안기부를 공격하고, 국민을 기만케 하고, 국가안전을 심히 위태롭게 한 행위임을 통보했습니다.

편지에서 우선, MBC 등 방송3사들이 국정원의 기획지원을 받아 KAL기 조작의혹제기를 하며 편파방송을 한 사태와, 국정원이 소송청구한 명예훼손 사건에 대하여 저의 의견을 밝혔습니다.

저에게 고통과 시련을 안겨다 준 국정원에 글을 쓰는 것이 좀 아이러니하지만, 새 정부의 국정원장이 국가안보의 책임자로서 사태해결의 주체가 되어 과거 정치관여 행위를 인정하고 ‘결자해지’해 줄 것을 요구하고, 국정원의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여 답신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국정원장도 지난 5월초 “과거 청지관여 행위를 반성하고, 최고의 역량을 갖춘 ‘순수 정보기관’으로 새롭게 출발하겠다”고 말한 터였습니다.

그러나 편지 전달 과정에서 담당간부로부터 “원장님께서 앞으로 안보체제를 재정립하겠다고 하셨다”는 원론적인 말만 들었고, 제가 제기한 안건들에 대해서는 구차한 변명들을 들어야 했습니다.

저는 지휘부에 국정원과 연계하여 편파기획 방송을 한 제작국 관련자들과 기획 명예훼손 소송사건에 관여한 당사자들을 검찰과 사법당국에 통보하고 의법처리해 줄 것을 호소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건 당시 돌아가신 중동근로자들 중 현대건설 소속 근로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던 KAL기 사건은, 현 대통령과도 직접 관련있는 사건임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통령 직속기관인 국정원은 음모를 크게 저지른 탓인지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책임론

제가 탄원서를 검찰과 법원에 제출한지 일주일이 되어 국정원 담당과장 등이 찾아왔습니다. 저의 남편이 “김현희가 원장님의 답신을 기다리고 있다. ‘결자해지’하시든 안하시든 의사를 분명히 해달라”라고 재차 말한 사실이 있습니다.

제가 지휘부에 편지를 보낸지도 3개월의 시간이 흘렀지만, 지휘부는 답신하지 않고 있습니다. 3개월 동안 답신하지 않는 것을 보니, 더 이상 지휘부가 저에게 답신하려는 의사가 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어제 저는 어떠한 다른 경로를 통해서라도 국정원의 과오에 대해 그 책임을 묻고 싶습니다. 국정원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국정원은 자기 반성없이 정권의 하수인이 되어 헌법을 수호하지도 않고 망국 행위를 서슴치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책임을 물으려고 여타 기관의 문을 노크해봤지만 아직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저는 정보기관이라는 국가 조직에, 북한과 남한 양쪽에서 근무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북에서는 공작원으로, 남한에서는 촉탁직원으로 오랫동안 근무했습니다. KAL기 사건을 두고 볼 때, 북한은 자신의 국가존립을 위해 남한에 대해 테러사건을 일으켰고, 남한은 어떠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과거 정부를 조작설로서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그리하여 북한은 KAL기 폭파사건으로 남북 간의 긴장과 갈등을, 남한은 조작설로 급진적 진보와 보수 간의 남남 갈등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남북한 정보당국들이 실하였던 공작들 모두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고 역사에 길이 남을 범죄행위였습니다.

북한은 사건 발생 후 미국으로부터 ‘테러지원국’이라는 오명을 달게 되었고, 국제 고아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대외정보조사부도 이 사건으로 그 책임을 물어 해체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북한으로서는 정말 혹독한 댓가를 치른 것입니다.

그러나 조작설의 ‘배후’ 혐의를 받고 있는 남한 정보당국은 그 혐의가 아직 탄로나지 않은 상태여서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고 있습니다.

북한 정보당국은 제가 공작임무를 맡고 떠나기 전 낭독하였던 ‘충성맹세문’에서처럼 분명한 명분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혁명전사로서, 저의 마지막 생명가지 바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공작 임무는 완수하였지만 이곳 남한에 와서 조사받는 과정에서 테러행위가 정의롭지 못하고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것을 깨닫고 후회하였습니다.

하지만 참여정부의 정보당국은 ‘명분’에 있어서 북한과 현저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국정원은 조직을 떠나 정착생활을 하는 저 개인에게 아무런 ‘명분’도 주지 않은 채, 지시를 거부했다고 하여 추방하는 등 부당한 공권력을 행사했습니다. 그 ‘명분’ 또한 밝힐 수 없는 부당한 명분이겠지요.

국정원은 제가 힘없고 연약한 여자라고, 죽음으로 내몰면 제가 굴복하여 따를 것이라고 착각하였나봅니다. 제가 KAL기 사건의 장본인으로 자백을 한 것처럼 국정원이 KAL기 조작설의 배후자로서 자백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국정원이 ‘배후’라는 사실을 스스로 시인하고 인정하기란 매우 힘들 것입니다. 시인하고 인정하는 자체가 조직의 운명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국정원이 자백을 하지 않는 이상, 음모의 전모를 알고 있는 국정원에 제일 먼저 그 책임을 집중적으로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다음 이 조작사태에 개입한 경찰당국, MBC 등 방송3사, ‘대책위’등에 대해서도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방송3사 제작진들은 자신들의 조작의혹 제기한 사항들에 대해서는, 안기부가 이미 조사한 결과 자료가 국정원에 보관되어 있으므로 그 자료를 제공받아 KAL기 사건이 누구의 소행인지를 분명히 밝히고, 편파방송에 대한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 명예훼손 소송사건으로 자신들 스스로 법의 망 안에 들어온 국정원 직원들인 고소인과 ‘대책위’ 소속 피고인, 변호사들을 의법처리하여 그 책임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시위와 선동을 주도한 ‘대책위’ 집행위원장, 신성국 신부 등 ‘대책위’의 전원에 대해서도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국정원은 KAL기의 엄청난 잔해들이 태국, 미얀마 현지 어부들에 의해 수거되어 고물상에 팔렸음을 알고서도 국정원 과거사 ‘발전위’와 함께 미얀마 해저에서 KAL기의 동체로 추정되는 인공조형물이 발견되었다며 수색 작업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발전위’가 혈세를 낭비하였고 3년 동안의 알맹이 없는 결과 발표 등 업무부실을 한 혐의에 대해서도 조사를 실시하고 그 책임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조작설과 테러지원국 해제

얼마 전(10월11일) 미국이 북한의 2차 핵실험을 우려하여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였다고 합니다. KAL기 사건 이듬해인 1988년 1월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한지 20년 9개월만입니다.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한 데 대해 남한 정부는 “북핵 6자회담이 궁극적으로 북핵폐기로 이어지는 계기가 마련된 것으로 평가한다”며 공식적으로 환영의 뜻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의 해제조치를 환영하면서도 KAL기 사건에 대해서는 사과는커녕 시인도 하지 않고 있고, 미국과 남한은 테러지원국 해제와 병행하여 북한으로부터 시인과 사과를 받아내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남한 정부는 작년 10월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정상회담 시 공식적으로 북한의 시인과 사과를 받을 좋은 기회를 놓치고, 대북 경제지원을 위한 10·4 정상합의를 하였습니다. 남한의 두 정부는 북한의 사과를 받아내는데 너무나 소극적이었습니다.

북한의 사과를 받지 못한 채 미국이 북한에 대해 테러지원국의 멍에를 내려놓게 한 것이 남한의 조작의혹자들에게 빌미를 주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잠잠하던 ‘KAL기 대책위’(위원장 김병상 신부)와 ‘가족회’(회장 차옥정)는 이 기회에 미국 국무부와 북한 외무성, 한국 외교통상부에 북한 테러지원국 해제 과정에서 KAL기 사건에 대해 어떤 논의가 이루어졌는지 묻는 질의서를 발송할 예정이라며 다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습니다.

‘대책위’의 입장은, 북한 역시 ‘가족회’와 마찬가지로 KAL기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 혹은 관련자라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대책위’가 참여정부 내내 그렇게 조작설을 선동하고 국회, 검찰, 국정원 앞, 등지에서 시위를 하면서도 외세개입을 두려워했는지 미국과 일본대사관 앞에서는 한번도 시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그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그들이 태도를 바꾼 이유는, 앞으로 북한 6자회담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혹시 북한이 KAL기 사건을 간접적으로라도 시인하게 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면 조작의혹투쟁을 전개했던 그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과거 권력 속에 누렸던 자신들의 존재감마저 상실될까봐 불안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는 미국 국무부와 북한 외무성이 그들의 질의서에 응답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무척 회의적입니다.

IAEA의 북핵 불능화 작업이 어느 선까지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향후 북한이 미국과의 수교를 전제로 하여 미국으로부터 핵보유국을 인정받는다면, 그때 친북·반미성향의 조작의혹자들은 과연 반미를 외치면서 북한을 변절자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요.

그들의 배후인 국정원은 이번 미국의 북한 테러지원국 해제조치로 KAL기 사건 조작의혹과 관련된 일체의 사태들을 멀리하면서 자신들의 과오를 극구 부인할 것입니다. 저는 테러지원국 해제와는 별개 문제로, 국정원에 대해 지난 책임을 반드시 묻고 싶습니다.

-맺음말

저는 최근에, 지난 정부에서 출간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 “1987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 있었던 대한항공기 폭발사건은 남북한 정부사이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고 기술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북한에 의한 테러’라는 사실과 이 사건으로 북한이 미국으로부터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 등 국민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들이 생략되어 있었습니다.

고교 역사교과서를 통해서도, 지난 정부가 친북성향의 역사의식을 가진 정부임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때문에 지난 정부가 KAL기 사건에 대해 조작의혹을 제기하고 과거사 위에서 재조사하는 소동을 벌인 일들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KAL기 사건에 관한 편향된 역사 해석들을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난 정부에서 발생한 KAL기 사건 관련 조작 음모와 과거사위들의 재조사 활동은 한마디로 ‘김현희와 안기부 죽이기’ 공연이었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들에게는 북한의 범행을 폭로하고 안보강연까지 한 김현희와 자신들의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고 공안 정치로 몰고 간 안기부가 숙청의 대상으로 간주된 것 같습니다. 저는 그들 정부가, 해방구가 된 국정원으로 하여금 그 작업을 시켰다는 데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북한이 기획한 KAL기 폭파공작은 제가 체포되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반면, 국정원의 KAL기 사건 음모 공작은 지킬박사와 하이드 같은 교묘한 양면 전술을 펴와서 여태껏 세상에 탄로나지 않고 무사히 버티어 왔나 봅니다.

그러나 세상에 정의롭지 못한 것은 언젠가 밝혀진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검찰과 사법부에 국정원의 해당 위법사실을 알렸지만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이제 세상에 알릴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저는 지난 날 저의 범행 사실을 국민에게 낱낱이 자백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북한의 가족들이 해체되었고, 저는 생사조차 알길 없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그 슬픔을 참고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저의 비극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국정원은 참회하며 조용히 살고 있는 저를 사건 발생 16년 만에 내쫓았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한솥밥을 같이 먹었던 직원들에 의해서 말입니다. 정말 인간적인 비애를 느낍니다. 저는 KAL기 사건으로 대외정보조사부가 해체되었듯이 국정원도 그만한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휘부에 편지로 간곡히 호소를 하였습니다. 정말 제가 가짜이고 사건이 조작된 혐의가 있다면, 수사권을 가진 국정원은 저를 긴급 체포하고 재신문하여 ‘김현희는 북한 공작원이 아니었고 안기부 공작원이었다’라고 재수사 결과 발표를 해야만 했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사실이 그렇지 않다면 국정원은 이제라도 조작 음모를 중단하고 사과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국정원은 저를 아무런 힘이 없는 여자라고 살해협박까지 하며 계속 괴롭혀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퇴직한 선임자들의 등을 향해 총질을 해대는 비겁함을 보였습니다.

국정원이 ‘안기부 죽이기’ 공연을 했다는 것, 이것이 하극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고도 그들은 오리발마저 감추고 태연하기만 합니다. 정말 국정원은 국가안보를 책임진 엘리트 집단이 맞는가요. 저는 국정원이 법을 떠나 이미 조직의 도덕률마저 상실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지 그들의 불의를 스스로 용기있게 말하는 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추방지에서 저를 신변보호보다는 감시에 더 가까운 보안관리를 하고 있는 경찰당국도 조직윤리의 상실이 국정권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조직의 법과 도덕적 가치를 내팽겨친 두 공안당국은 저를 위험스런 ‘관찰대상자’로 감시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들이 저보다 더 위험스러워 보입니다.

앞으로 제가 부정한 국가기관과 공영기관, 시민종교 단체들과 맞서 투쟁해야만 할 운명에 처해질 것 같습니다. 친북성향의 정부가 물러가고 실용의 정부가 들어섰지만, 저 혼자 그들을 대처하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입니다. 인내하면서 살아온 5년이 헛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제가 이곳에서 시련의 나날을 보내는 동안 의혹 제기자들은 저의 부모도 북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주장하지만, 저는 꿈속에서나마 그리운 부모님과 동생들을 만납니다.

북한당국은 일본어선생 이은혜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고 하지만, 그녀가 초대소 창문 밖을 내다보며 어린 두 자식이 보고 싶어 울면서 끌려온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던 모습이 떠오르곤 합니다.

몇해 전 일본 TV방송에서 방영된, 이미 청년이 된 이은혜의 아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의 큰 눈매가 어머니의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저를 만나 자신의 어머니 얘기를 듣고 싶다고 했지만, 그렇게 해줄 수 없는 저의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생사를 모르는 북녘의 가족들과 생이별 하고, 이 곳에서 추방생활을 하고 있지만 저의 두 자식을 가까이서 보며 지낼 수 있다는 것에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 몸 건강하시고 안녕히 계십시오.

2008년 10월 하순

김현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