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정권 붕괴와 북한간부들의 비상구

북한체제가 효율성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은 북한의 간부 계층이다.

폐쇄적인 체제에 살면서 외국과 아무런 접촉이 없는 일반인민과 달리 고급 간부들은 자본주의 서양 국가에 가본 적이 있고 남한의 경제적 성과에 대해서도 모르는 게 아니다. 그들은 중국이 개혁개방을 통해 나라의 경제를 살리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북한 간부들은 하루 아침에 자신을 공산당 간부에서 자본주의 사업가로 바꾼 소련 간부들을 모방하지 않고 있을까? 소련식의 즉각적인 체제전환이 문제가 된다면, 왜 중국식의 점진적인 개혁개방의 길로도 들어서지 않고 있을까? 북한 간부들은 정말 분석력이 없기 때문일까?

북한 간부들 ‘합리적 선택’ 중

유감스럽지만 북한 지배층이 실시하고 있는 체제유지 전략은 합리주의적 분석에 의한 선택이다. 북한정권이 직면한 도전은 구소련이나 중국이 체험했던 사정과 차이가 매우 크다. 풍부하고 자유로운 나라 남한이 있기 때문에 이 ‘또 하나의 조선’의 존재가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인 것이다.

중국도, 소련도 이와 비슷한 도전은 없었다. 물론 1970년대에 들어와 소련 사람들도 자신의 나라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보다 잘 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정치적인 활동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소련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미국은 부자 나라였지만 문화도 틀리고 역사적 경험도 다른 민족이었다. 그래서 미국의 풍부함은 소련 사람들의 생활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물론 미국의 사례는 자본주의 경제의 효과성을 분명히 보여준 것이니까 공산주의 환상을 파괴시킨 이유 중 하나였다. 그래도 소련 사람들에게 미국의 생활 양식은 그저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이 즐기는 풍부한 생활일 뿐이었다. 아무튼 소련이 ‘미국의 제51주’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남북한 경우는 사정이 너무 다르다. 60년 동안 남북 통일이 민족의 최고 목적이라고 교육받은 북한 사람들은 남한을 다른 나라로 보기 어렵다. 주민들이 남한의 생활수준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되면 북한정권은 김부자(父子) 정권의 정당성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북한 주민들은 구동독 주민들처럼 통일을 통해 남한과 비슷한 생활수준을 쉽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있다. 사정이 이렇게 되면 독일식 흡수통일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북한 간부들의 고민

최근 서울의 정치계에서 흡수통일을 무섭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역사란 것은 개인의 바램을 무시하는 편이다. 만약 북한에서 즉각적인 통일을 요구하는 운동이 벌어진다면 남한측이 북한주민들의 통일 요구를 어떻게 거부할 수 있을까.

그러나 지금 북한의 간부로 있는 사람들은 사정이 다르다. 그들은 ‘통일 한국’에서 과연 어떤 처지가 될까?

소련에서는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진 다음에도 공산당 간부 출신만큼 잘 사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들에게는 경험과 지식, 인간관계 등이 있었기 때문에 탈사회주의 경제에서도 자본가가 되었다. 그들은 공산주의 시절 간부로서 경영했던 공장이나 기업소들을 자신의 개인 소유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통일 후 북한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것 같다. 북한 간부들이 미래에 대해 공포감을 가질 만한 근거가 있다.

첫째, 통일이 되어 남한 대기업이 북한으로 진출하면, 북한 간부들이 자신이 통제하는 기업소를 개인소유로 바꿀 경우에도 녹슨 장비와 1950년대식 기술을 가진 북한 공장들은 첨단의 남한 기술과 자본에 대응하는 경쟁력이 없을 것이다. 1950년대 초의 소련 GAZ 지프를 본떠서 만든 ‘자력갱생호’가 쌍용자동차의 Rexton과 경쟁하지는 못할 것이다.

둘째, 소련과 중국에서는 간부 출신들을 제외하면 새로운 지도자로 떠오를 수 있는 인재(人材)가 거의 없었다. 구소련 시대때 사회 진출에 대한 야심과 능력이 있었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 공산당을 통해 출세했다. 공산주의가 무너진 다음에도 간부 출신들에게 도전하거나 그들을 대신할 정치세력이나 사회계층이 형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통일 한국’은 남한 출신들이 한반도 북반부의 새로운 특권층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셋째, 북한 간부들은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1991년 소련이 무너졌을 때는 무고한 사람들의 피가 강처럼 흐르던 스탈린 시대가 끝난 지 이미 40년이 지났을 때였다. 스탈린 시기 대중 학살에 책임이 있는 자들은 다 죽었거나 노인이 되었다. 물론 스탈린 사망 후에도 민주주의 체제는 아니었지만 많이 온건화되었다. 스탈린 시대때 정치범 수는 130만 명에 달했지만 1960-70년대에 들어와서는 1천명 정도로 격감했다.

그러나 북한은 아직도 대중 학살, 만연한 고문, 정치범 사형 등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정책에 책임을 져야 할 간부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스탈린식 공산주의 활동방식을 염두에 둔다면, 지금 북한 간부들 대부분이 직접 또는 간접적인 책임이 있을 것이다. 밀정으로 활동했거나 경쟁자의 체포를 위해 음모를 꾸몄거나, 적어도 ‘반동분자’가 된 친구를 공격한 간부들은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 간부들은 체제붕괴가 되면 자신의 특권뿐 아니라 재산과 신체의 자유까지 분실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위협에 직면해 있는 북한의 간부계층이 자신들의 생존조건인 체제유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북한 간부들의 탈출 비상구는?

현 북한체제를 보장하기 위한 요건은 세 가지 정도가 될 것이다. 첫째, 주민들로 하여금 남한을 비롯한 외국에 대해 계속 아무 것도 모르도록 하고, 둘째, 주민들이 비밀경찰과 당국자들에게 계속 공포감을 가지며, 셋째, 주민들이 독립적인 사회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요건은 중국식 개혁개방과 양립하지 않는다. 북한 간부들도 개혁이 없이는 나라의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개혁개방을 시작하면 자신의 생존이 위협받게 된다. 그래서 진퇴양난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지금 북한 간부들에게는 비상구가 없다. 하지만 그들도 ‘비상구’를 발견하게 되면 체제유지를 위한 학살적인 정책을 계속하는 동기가 약화될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이지만 한국정부의 정책은 북한 간부계층들의 이익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체제붕괴를 초래할 수 있는 심각하고 종합적인 위기가 발생할 경우, 남한 정부가 북한 간부들에게 대사면을 베풀겠다는 약속을 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분단 시대때의 범죄는 무조건 일반사면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물론 사면이 옛날에 저지른 범죄를 조사하지 않고 간부 출신들이 무조건 좋은 대우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진 동구 국가들의 경험을 보면, 대부분 ‘정화법’ (lustration)이 실시되었다. 정화법에 따라 과거 공산정권에서 고위직을 차지했던 사람들도 주요 직책에 임명되지 못했다. 그러나 주요 직책에 임명되지 못한다는 것이 감옥으로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통일 후 북한에 이러한 정화법이 좋은 아이디어가 될 수 있는데, 필자는 이 정화법이 대상이 될 간부들도 그리 많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물론 김정일의 가족이나 측근들은 이같은 사면 제안을 믿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김정일의 가족들은 국제보험을 받으면서 해외에서 체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동안 훔친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일부분으로 스위스 같은 제3국에서 살게 되면 나쁜 일이 아니다. 북한에서 발생할 폭력적인 혼란을 막기 위해서도 그리 비싼 값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일반 사면, 체제붕괴후 도움

이러한 정책은 간부들이 체제를 ‘결사옹위’ 하지 않도록 하고, 수많은 생명을 구하는 방법일 뿐 아니라 통일 한국의 사회 분위기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통일 한국의 정부가 간부 출신들을 고용하는 것은 불가피할 것이다. 이것은 친일파 출신들을 고용한 이승만 정부의 선택과 아주 비슷하다. 1940년대 말에는 친일파 출신이 아닌 전문가와 경험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 기회주의자들은 싫든 좋든 고용되었다.

또 북한 간부라면 거의 모두 범죄적인 행위와 관계가 있는데, 일반사면이 없으면 중요한 정보를 가진 간부들이 정보를 바꾸고 조작하여 다른 간부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거나 공갈, 협박하기 쉬울 수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옛날의 잘못에 대한 정보는 여러 정치세력에 의해 조종될 수 있는 폭발적인 문제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면이 이뤄지면 김정일 정권을 위해 종사한 사람들이 모두 새로 시작할 기회를 갖기 때문에 이러한 우려를 예방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조치에 대한 반대 목소리도 커질 것이다. 순수 도덕적 입장에서 보면 필자도 이러한 목소리를 충분히 이해한다. 부모와 친구들을 잃고 복수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제안은 한반도 역사에서 전례없는 범죄행위를 저지른 자들의 처벌을 면하도록 하는 것이 원래 목적이 아니다. 이러한 제안은 간부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생하는 일반주민들의 생활을 구하기 위한 정책이라고 생각된다.

국가보위부 고문실이나 정치범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소생시킬 방법은 이제 없다. 그리고 역사에 대한 정리는 역사가들에게 남겨주면 좋겠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단 때문에 입은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고, 60년 넘게 분단된 한국이란 나라를 다시 하나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이 길에서 타협은 불가피한 것이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초빙교수, 역사학 박사

<필자 약력>
-구소련 레닌그라드 출생(1963)
-레닌그라드 국립대 입학
-김일성종합대 유학(조선어문학과 1986년 졸업)
-레닌그라드대 박사(한국사)
-호주국립대학교 한국사 교수(1996)
-저서 : <북한현대정치사>(1995) <스탈린에서 김일성으로>(From Stalin to Kim Il Sung 2002) <북한의 위기>(Crisis in North Korea 2004)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