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전용 8호 농장과 ‘장군사과’

▲ 북한 일반농장의 사과(사진: 연합)

내가 북한에 있을 때 일이다. 92년에 우리 집에서 맏형 결혼식을 하느라 친척들과 모인 적이 있었다. 평성에 있는 큰집에도 연락하고, 신의주에 있는 친척들에게 ‘조카 결혼식을 하니 오라’는 전보를 날렸다. 며칠 후 평성에 사는 사촌 누이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결혼식 전날 지프차를 가지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어른들은 ‘역시 그 애가 수완이 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촌 누이는 평남도에서 ‘김정일의 식량’을 공급하는 ‘8호농장’ 담당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언제나 한몫 했다. 누이는 이번에도 “잔칫상에 올려놓을 큰 상감(상에 올려놓을 좋은 음식)은 내가 준비하겠으니 따로 준비하지 마세요”라는 말도 덧붙였다.

누이가 집에 도착해 짐을 풀어놓으니 각종 당과류들과 사과, 배, 포도 심지어 버섯, 산채 같은 것도 들어있었다. 사과를 꺼내보니 우리가 평소에 시장에서 보던 그런 사과가 아니었다. 크기가 진짜로 핸드볼 정도 크기였고, 색깔도 좋고 무척 향기로웠다.

모두 “와, 우리나라에 이런 사과가 있었어? 이거 수입한 거 아니야?” 라고 놀라자, 누이는 “지도자 동지께 드리는 사과인데, 우리 농장에서 ‘불합격’ 돼서 가져온 거야” 라고 조용히 말하는 것이다. 누이가 가져온 ‘불합격품’ 덕에 우리 집에서는 잔칫상을 보란 듯이 차릴 수 있었다.

김정일의 식품진상 전용 ‘8호 농장’

‘8호 제품’은 중앙당 재정경리부에서 각 농장에 과업을 주어 걷어들이는 ‘김정일의 식량’이다. 사람이 건강하려면 오곡을 다 먹어야 하듯이, 김정일이 먹을 오곡을 생산하는 농장들이 따로 있다. 이것을 생산하는 농장이 8호 농장이다.

‘만수무강연구소'(김정일의 건강담당 연구소)에서는 김정일의 건강관리표를 짜서 어느 지역의 쌀이 좋고, 어느 골짜기의 물이 몸에 맞고, 어떤 부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중앙당 재정경리부에 통보한다. 그러면 재정경리부는 통보서에 맞는 지역을 선정하여 8호 농장을 꾸리고 생산계획을 많이 주지 않고, 질적으로 생산하도록 과업을 준다.

8호 제품이 나오기 전에 9호 제품이 있었다. 9호 제품은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동시에 공급되었다. 그러나 80년대 후계자로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김정일은 “9호는 수령님께 드리고, 나는 8호에서 받겠습니다”라고 사양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 재정경리부에서는 김일성은 ‘9호 제품’, 김정일에게 바치는 것은 ‘8호 제품’으로 이름을 붙여 생산하기 시작했다. 말만 등급이 있을 뿐, 재정경리부 8호 담당 부서에서 요구하는 수준은 아주 엄격하다.

재정경리부의 지시를 받는 8호 농장은 농업위원회 8호 관리국, 도 농촌경리위원회 8호 관리처, 군 경영위원회 8호 담당을 거쳐 운영된다. 다른 농장에 영농자재와 물자는 공급되지 않더라도 8호 농장만은 우선으로 공급한다.

좋은 오곡만 알알이 골라, 설탕 먹는 사과나무

물 좋고, 기름진 쌀이 나오는 지역은 어김없이 8호 농장이 되었거나, 8호 작업반이 자리잡고 있다. 옛날 조선 임금이 먹던 숙천, 문덕의 ‘열두 삼천리벌’의 쌀도 지금은 8호 제품으로 생산되어 평양에 올라간다. 8호 농장은 화학비료를 전혀 쓰지 않고, 유기농 영양분과 퇴비를 사용한 완전한 녹색식품이다.

8호 농장 농민들은 가정환경이 좋고, 열성분자로 구성되어 있다. 찹쌀, 좁쌀, 기장, 수수, 깨, 팥, 밤에서부터 각종 부식물에 이르기까지 품종별로 생산한다. 생산된 쌀은 똑같은 크기의 쌀로 1차 선별을 하고, 2차는 농민들이 앉아 꼬챙이로 알알이 고른다. 만약 쌀에 약간 흠집이 있어도 불합격이 된다.

그렇게 많이 생산된 곡물은 일부만 김정일이 먹고, 일부는 자기의 측근들에게 배급되며, 일부는 ‘선물’로 이름을 붙여 열성분자들에게 하사한다.

가을이 되면 생산된 곡물은 중앙에서 내려온 재정경리부 차들이 농장마다 순회하며 수거해간다. 김정일에게 들어가는 곡물은 최종적으로 ‘만수무강연구소’의 세밀한 검사를 거친 다음 김정일의 음식상에 올라간다.

누이의 말에 의하면 자기네가 관리하는 과수농장은 숙천과 순천에 있는데, 봄철에 사과나무에 설탕을 심는다고 한다. 봄이 되면 8호 과수농장으로 한 그루당 30kg씩 계산되어 중앙당에서 설탕이 직송된다고 한다.

한그루의 사과나무에서 많이 생산하지도 않고 몇 십 알씩만 생산한다. 봄에 나무마다 돌며 몇 십 개의 꽃눈만 두고 따버려 사과가 크고 맛있게 열리게 한다. 8호 농민들은 벌레가 먹을세라 고깔을 씌어 사과 알을 보존하는 등 최상의 노력과 충성심을 기울여야 한다.

남한에는 동네슈퍼에 가도 설탕이 있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겠지만, 북한에서는 어린이들이 감기에 걸리면 어머니가 ‘귀한 약’으로 한 숟가락씩 뜨거운 물에 정성껏 타먹이는 것이 설탕이다.

한영진 기자(평양 출신 2002년 입국) hyj@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