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父子 연구실’ 폭파기도사건 있었다

▲ 김정일 대리석상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소재 추정)

북한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혁명역사를 연구한다는 ‘연구실’이 도시에서 농촌 마을에 이르기까지 전국 방방곡곡에 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곧 하나님이고 김정일이 예수님인 셈이니, 김일성 ∙ 김정일 연구실은 수령교(首領敎)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그 숫자도 남한의 교회만큼이나 많다.

그 위치를 찾기도 쉽다. 북한땅을 돌아다니다 도, 시, 군의 가장 경치 좋고 중심인 곳, 그리고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깨끗한 건물을 발견한다면 바로 수령우상화의 거점인 ‘연구실’이라고 생각해도 틀림없다.

식량난 시기 反정부 움직임 많았다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식량난에 허덕이는 주민들의 민심이 흉흉해지고, 삐라살포와 격문부착 같은 반정부적인 움직임이 나타났다. 굶주림에 온 가족이 죽거나 떠나면서 생겨난 빈집들에서 김부자(父子) 초상화 분실사고가 빈발하였고, 거리복판에 김부자의 초상화가 갈기갈기 찢겨 버려진 사건도 속출했다. 불만이 극에 달한 주민들 가운데 김일성 ∙ 김정일을 원망하면서 우상화의 대표적 상징물인 연구실을 폭파하려는 움직임도 생겨났다.

평안북도 대관군 대안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김모씨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치안대에 협조했다가 처형되었다. 김씨는 석회광산에서 일했는데 ‘반혁명분자의 아들’이라는 낙인 때문에 평소 주위사람들과 격리되어 말도 잘 하지 않았다. 그 마음속 고충을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수 없었다. 그러다 수백만의 북한 주민들이 굶어 죽으면서 당국에 대한 원성이 최고조에 이를 때 신세한탄을 한답시고 큰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

마음에 맞는 친구와 술을 마시며 “이건 사람 사는 생활도 아니다. 모두가 김정일이 때문이다. 내가 저 연구실을 박살내고 남조선으로 가겠다”라며 취중에 이야기한 것이다. 그런데 같이 앉아 술을 마신 그 친구는 보위원이 김씨를 감시하라고 붙여놓은 정보원이었다.

담당보위원은 김씨를 ‘현행범’으로 잡기 위해 지켜보며, 그의 ‘거사’를 기다렸다. 김씨는 광산에서 사용하는 발파용 폭약 약 3킬로그램을 감추었다가 1997년 12월 24일 밤 인근 농촌마을에 있는 연구실로 접근했다. 12월 24일은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의 생일이고 김정일이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된 날이다.

몸에 폭약을 지니고 연구실 가까이에 도착한 그가 불을 당기려는 순간 연구실에 매복하고 있던 보위원과 정보원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안전부 구류장에서 한 달 남짓 취조를 받다가 도 보위부 예심처로 이송되었는데 그 후 소식은 알 수 없다. 훗날 도 보위부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그런 놈은 도끼로 머리를 박살내 죽여 치운다”고 하던 말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하다.

석고상 청소 잘못해 쫓겨난 당비서

김일성과 김정일 연구실은 같은 건물에 위치한다. 연구실 관리는 당 선전부에서 맡고 있는데 연구실장은 선전부 부부장(차장)급의 대우를 받는다. 일반적으로 아래층에는 김정일관, 위층에는 김일성관이 있는데 규모가 큰 연구실의 경우 김일성관이 2개 층을 점하기도 한다. 김정일관, 김일성관의 중심에는 석고상을 안장한다. 그런데 이 석고상 관리만큼은 다른 누구를 시키지 않고 연구실장이나 당비서가 직접한다.

석고상은 흰 곱돌과 백석회로 빚었기 때문에 걸레나 먼지떨이를 사용해 청소해서는 안 된다. 공기압으로 바람을 일으켜 먼지를 날려보내야 한다. 어느 당비서의 아내가 남편을 대신해 청소를 한답시고 김일성 석고상 콧등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뜯어내다 비판무대에 제기되어 남편이 자리에서 쫓겨난 일도 있다.

모든 연구실에는 유사시에 김부자의 석고상을 폭격으로부터 보위하기 위한 지하갱도가 있다. 발단은 1993년 1차 핵 위기 때 김정일의 지시로 시작되었는데 “1톤 폭탄이 떨어져도 끄떡없게 건설하라”고 했다. 그래서 멀쩡하게 서있는 건물의 지하를 다시 파내려 가기 시작했다. 지하와 건물 사이에 시멘트와 철근, 자갈을 섞어 보통 2m 두께의 보호막을 형성해 붕괴를 막았다.

지하를 파는 도중 수맥을 건드려 물이 솟구쳐 오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양수기를 이용해 물을 퍼냈는데, 장마철이 되면 지하실에 물이 가득 차 각종 책상과 의자가 둥둥 떠다니기도 했다.

유사시 지하갱도, 연구실 보위대까지 만들어

그런 사건이 있은 후 연구실마다 ‘연구실 보위대’라는 것을 만들어 밤을 새며 지켰다. 1998년 9월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가 있기 3일 전부터 북한 전역의 노동적위대, 교도대에는 비상이 걸렸다. 당국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파탄시키기 위해 남조선 특공대가 낙하한 데 따른’ 소탕작전이라고 했다. 공장 당비서와 참모들은 노동자들을 무장시키고 주변의 높은 산들을 수색토록 하는 한편 김부자 연구실에 대한 수비를 증강했다.

‘특별경비주간’에는 연구실을 에워싼 채 한숨도 자지 못하고 경비를 섰다. 밤이면 도시 한가운데 있는 연구실에도 전기가 끊긴다. 자정을 넘긴 새까만 밤에 경비를 설 때면 그 유령 같은 빈집에서 귀신이 나올까 봐 머리칼이 곤두서던 생각이 난다.

한영진 기자(평양출신 2002년 입국) hyj@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