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10여년 학습으로 재난대처 역량 증대

지난 여름 북한의 수해 때 북한 당국의 피해상황 공개와 북한 적십자회의 긴급구호 활동은 예년에 볼 수 없을 정도로 신속해 북한 분석가와 관측통들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특히 그동안 구호활동보다 대남사업 등 대외활동에 주력하던 조선적십자회가 전국 각 지역의 재난대비 창고에 비축해뒀던 모포, 천막, 부엌세간 등 구호물자를 수재민들에게 즉각 나눠주고 적십자 봉사요원 1만수천명이 구조작업에 나서는 모습이 북한 언론에 의해 보도됐다.

또 북한 당국의 범정부적 대책위원회 위원장 격으로 로두철 내각부총리가 수해 대책 활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었다.

북한 당국의 신속한 재해정보 공개에 대해 일각에선 외부지원을 받기 위한 ‘피해상황 과장’이 아니냐고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수해에 대한 북한 당국의 ‘이례적인’ 대응 양태는, 북한이 1990년대 중반 이후 잇따른 자연재해와 대형 인재를 겪으면서 10여년 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재난 대응과 관리 제도를 발전시켜온 결과라고 미국의 한 한반도 전문가가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아시아태평양안보연구센터(APCSS)의 알렉산드르 만수로프 교수는 한미경제연구소(KEI)에서 최근 발간된 논문 ‘선군시대 북한의 재난 관리와 제도 변화’에서, 1990년대 중반 이래 북한에서 일어난 7대 자연재해 및 인재 내용과 북한의 대응을 분석, 북한 당국의 대응에서 재난 정보의 투명성 증대 등 5가지 특징적 흐름을 찾아냈다.

만수로프 교수의 분석 대상은, 영향이 국지적이었던 2004년 룡천역 폭발, 지역적 수준의 재해였던 2000년 태풍, 2001년 홍수, 2002년 홍수와 태풍, 전국적 피해를 낳은 1995-6년 홍수와 1997년 가뭄, 2003년 사스(SARS.중증급성호기증후군), 2005년 조류 인플루엔자 등 7개 재난 때 북한 당국의 대응 양태.

북한 주재 러시아 대사관에서 근무한 외교관 출신인 만수로프 교수는 북한의 재난관리.대응체제의 발전 추세를 설명하면서 “북한 사회는 변화가 없고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거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유일한 행위자”라는 등의 통상적인 가정이 실제론 사실이 아니며, 북한 체제도 환경에 대응해 진화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투명성 증대 = 북한 당국이 1990년대 중반의 자연재난으로 인한 피해나 경제난, 식량문제를 인정하는 데는 수년이 걸렸으나 2000년 8월 태풍 피해 보도는 3주 뒤에 나왔고, 2001년 10월의 홍수 피해 소식은 6일만에, 2002년 8~9월 태풍 피해 소식은 3일만에 보도됐다.

2004년 4월 룡천역 폭발은 이틀 만에 보도됐다. 북한 당국은 2005년 2월 조류인플루엔자에 대해선 발생 3주후 외부에 알렸다.

특히 올해 8월의 홍수와 복구활동은 곧바로 자세하게 외부로 알려졌다. 장 피에르 드 마저리 세계식량계획(WFP) 평양사무소장은 “북한 정부가 수해 평가를 위해 해당 지역에 대한 유례없는 접근을 허용해 투명성과 협력의 수준을 개선했다”고 말했다.

◇재해관리 능력과 노하우 증대 = 재해관리 제도 차원의 지식과 역량도 증대됐다. 조선적십자회 재해대비센터, 국가수의비상방역위원회와 지방의 수의방역위원회, 중앙기상수문국 수문연구소, 큰물피해대책위원회 등이 모두 지난 10여년간 재해 관리의 경험과 학습 과정에서 설치된 새로운 조직들이다.

이들 기관은 위험분석(risk mapping)과 평가 수단, 방대한 데이터베이스, 각종 자연재해와 전염병 대처를 위한 실용 지침서 등을 만들어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조선적십자회로, 국제적십자연맹(IFRC)의 도움을 받아 수색구조, 응급구호, 비식량분야 지원 등의 활동 면에서 주도 기관으로 발전했다.

◇기관간 협력 증대 = 부처간 재해대책 협력은 1990년대 중반까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나 1998년 헌법 개정으로 내각의 사회경제발전 역할이 점차 강화됨에 따라 재해관리 기능도 내각의 책임으로 간주돼, 2001년 수해 때부터 각 성(省)의 부상급들로 비상설 관계기관 대책기구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이들 관계기관대책기구는 통상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과 물자공급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로두철 부총리가 맡고 있다.

1990년대 중반엔 기관간 수평적 상호작용은 없이 관할다툼이나 서로 뒤에서 헐뜯기만 있었으나, 이러한 기관간 협력은 상호 이해와 아이디어 교류, 대책 조율, 공동 계획 추진 등의 효과를 가져왔다.

◇능동적 대처와 예방차원의 접근 = 1990년대 후반엔 육체적 생존이 문제였고, 긴급구호라고 해야 소수의 충성 계층에만 해당됐으나, 국내 사정이 안정되고 당국의 재난관리 역량이 증대하면서 새로 조직된 재난관리기구들은 능동적이고 예방적인 조치들을 발전시켜 나갔다.

특히 조선적십자회 재해대비센터는 각 도에 기본 구호물품 비축용 창고를 두고 각 군.읍과 촌락에 응급구호소를 설치했다.

◇북한 당국과 국제인도주의단체들간 협력 증대 = 국제구호단체들은 처음엔, 피해지역이나 주민들에 직접 접촉하기 위해선 북한 당국과 힘든 협상을 벌여야 했고 때대로 정치적 조건이 붙기도 했지만, 이제는 국제구호단체들과 북한 당국간 협력 범위가 구호물품 수요 공동조사에서부터 감시와 사후평가에까지 확대됐다.

더욱이, 조선적십자회는 1990년대 후반이래, 구호물자를 가장 취약계층에 배급하는 등 적십자 정신에 점점 충실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