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조문단’으로 왔다가 ‘특사’로 가다

김기남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를 단장으로 하는 북한의 조문단이 23일 청와대를 방문, 이명박 대통령을 면담하고 돌아감으로써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 조문단’으로 왔다가 이 대통령에게 김 위원장의 메시지를 전하는 ‘특사’로서 임무를 전환수행한 것이 됐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20일 조문단 파견 사실을 전하면서 “국방위원회 위원장 김정일 동지의 위임에 따라 특사 조의방문단”이라고 ‘특사’라는 표현을 앞세워 눈길을 끌었다.

`특사’라는 게 김 위원장이 직접 특별하게 파견했다는 일반적인 뜻일 수도 있지만, 2001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별세했을 때도 북한은 “김정일 동지에 위임에 따라”라거나 “김정일장군님께서 직접 파견하시는” 조의대표단이라고 말하면서도 ‘특사’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었다.

조문단 방문 이틀째 조찬 자리에서 북한의 김양건 통전부장은 “우리는 김정일 위원장의 특사로 왔다”며 ‘특사’라는 말을 3번이나 강조하고 “남북관계 개선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누구든 만나서 모든 분야에서 톡 까놓고 솔직하게 얘기하자”고 말했다고 당시 조찬 참석자가 전해 조문단 스스로 조문 목적만이 아닌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특사로서 임무를 감추지 않았다.

조문단은 서울 도착 첫날인 21일 국회에 마련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김 위원장이 보낸 조화를 헌화하고 김대중도서관에서 미망인인 이희호 여사를 면담하는 것으로 조문단 역할을 마치고 이후 임무를 전환, ‘특사’로서 활동에 초점을 맞췄다.
북한 특사 조문단의 이러한 이중적 성격은 지난 2005년 평양에서 열린 6.15공동선언 5주년 남북공동 행사에 참석했던 남측 대표단의 행보와 유사하다.

당시 정부 대표단의 단장으로 방북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면담을 북측에 요청했고 행사 마지막날 면담이 성사되면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특사’로 전환, 임무를 수행했다.

정 장관은 노 대통령의 메시지를 김 위원장에게 전달하고 남북관계를 풀기위한 다양한 현안을 논의하고 돌아온 뒤 곧바로 미국으로 날아가 김정일 위원장의 입장을 전하며 북미간 중재역할을 함으로써 이후 9.19 공동성명이 탄생하는 데 주춧돌을 놓았다.

남북간 특사나 밀사 교환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관통하며 남북관계의 전기를 마련하는 돌파구로 활용돼 왔다.

1972년 남북회담이 시작되자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북한에 비밀리에 보내 남북관계의 대헌장으로 평가되는 7.4남북공동성명을 탄생시켰다.

전두환, 노태우 정부 때는 ‘북방정책’의 기수 역할을 한 박철언 당시 장관이 북한의 한시해 당시 통일전선부 부부장과 채널을 유지하는 가운데 각각 장세동, 서동권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이 북한을 방문해 남북 정상간 간접대화를 갖도록 했다.

김대중 정부에선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이 북측과 비밀협상을 통해 반세기만의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임동원 당시 통일부 장관은 2002년 4월과 2003년 1월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기위해 방북하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에선 김만복 당시 국가정보원장이 대통령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특사로 비밀 방북해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북측에서도 이번에 조문단으로 서울을 방문한 김양건 통전부장이 정상회담 직전과 직후 특사 자격으로 서울을 방문했다.

한 대북 전문가는 “특사는 일반적으로 꼬인 관계를 풀기위해 남북 최고지도자의 의지를 받들고 가는 것이 일반적”이라며 “이번 조문단이 이명박 대통령 면담을 통해 특사 임무를 완수함으로써 앞으로 이산가족 상봉과 연안호 석방 등 남북관계에서 가시적 진전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