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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갑자기 일어나 나가는 바람에 놀랐다. 내가 알던 사람하고 달라서 그랬다.”
22일 종결된 제13차 경제협력추진위원회(경추위) 남측 위원장으로 처음 이번 경추위를 이끌었던 진동수 재정경제부 제2차관이 공동보도문 합의 이후 북측 협상 파트너였던 주동찬 위원장에 대해 느낀 소회를 이렇게 털어놨다.
아닌 게 아니라 북측 회담 대표로 나온 주 위원장은 경추위 첫날부터 회담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오전 10시로 예정됐던 1차 전체회의를 남측의 ‘기조발언문’ ‘공동보도문(초안)’ ‘쌀차관제공합의서(초안)’의 사전 교환을 요구하며 기선을 제압했다.
이후엔 북측이 이례적으로 전체회의를 공개하자고 요구했다. 이에 당황한 남측은 “전례에 없고 생산적이지도 않다”는 이유를 들어 전체회의 공개를 거부했다.
지난 장관급회담에서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북측에 “쌀 40만t과 비료 35만t 제공에 합의했다”고 밝힌 뒤 말을 바꿔 ‘이면합의’ 논란이 불거졌듯이 아무래도 북측과의 회담 내용이 100% 공개되는 것을 꺼려하는 남측의 심리를 역이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오후 늦게야 열린 전체회의에선 남측 회담 대표의 기조발언에서 ‘2·13 합의’ 초기조치 이행을 촉구하는 내용의 발언이 이어지자 북측 주 위원장은 “왜 경추위에서 ‘2·13 합의’를 거론하느냐”며 회담장을 박차고 나가는 일이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종결회의에 앞서 열린 위원 접촉에서도 북측 관계자는 또 다시 회담 도중 뛰쳐나가 ‘2·13 합의’에 대한 논의는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는 강한 압박성 경고행위가 이어졌다. 남측 대표단으로선 예상치 못한 상황이 연이어 발생한 것이다.
북측이 이러한 모습은 물론 예전에도 종종 있어왔지만 첫날 전체회의 일정을 틀어가면서까지 남측 대표단을 압박한 것은 이례적이다. 북측이 이러한 제스처를 취한 것은 우선 ‘2·13 합의’ 초기조치 이행과 식량지원 연계문제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남북회담에서 위원장 자격으로는 처음으로 회담에 임한 진동수 위원장에 대한 일종의 길들이기 내지 기선 제압용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22일 최종 합의서에는 열차시험운행을 5월 17일 실시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초미의 관심사였던 쌀 40만t 차관은 5월 하순경에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합의했다. 그러나 회담 전부터 공언했던 ‘2.13 합의’ 이행과 관련한 문구는 포함시키지 못했다.
쌀 차관과 관련해선 “2·13 합의의 성실한 이행이 필요하다”며 ‘2.13 합의’ 이행과 쌀 지원이 연계된 듯한 뉘앙스로 말하고 있지만,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이면에는 실제 쌀 지원이 가능한 시점인 5월 하순까지는 북측이 영변핵시설 폐쇄조치가 실현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리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진 위원장도 “이 사람들(북측)이 한 달 이상의 시간이 남아 있다”며 “상황 변화가 있으니까 그때 가서 충분히 판단해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작년 5월 열차시험운행에 합의해놓고도 북측이 ‘군부의 반대’를 이유로 직전 합의를 파기했듯 열차시험운행을 위해선 ‘군사적 보장조치’가 시급한 과제다. 그러나 이번 합의에선 ‘열차시험운행 이전에 군사적 보장조치가 취해지도록 적극 협력한다’는 원론적 입장을 확인하는 데 그쳤다.
또한, 남측은 경협 활성화를 위해선 해로를 통한 경협물자 운송은 물류비를 높이고 생산품 납기지연의 원인이 돼 한계가 있다며, 경협물자의 육로운송 문제를 협의할 것을 새롭게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북측이 요구했던 쌀 지원과 경공업 원자재 제공에 대해선 대부분 북측의 입장을 수용했다. 남측으로서는 충분히 줄 것을 주고도 마땅히 받아야 할 것들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결과물이다.
특히, 이번 합의문에 들어간 ‘열차시험운행’ ‘경공업 원자재 지원 및 지하자원개발 협력’ ‘임진강 수해방지 사업’ ‘한강하구 골재채취 사업’ 등 이미 지난 회담에서 합의한 내용들을 다시 한 번 거론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재정 장관은 경추위 결과를 놓고 “학점으로 따지면 ‘수(秀)’를 주겠다”고 평가했다. 얼마전 한미 FTA 협상을 이끌었던 김종훈 대표가 타결직후 스스로 ‘수’라고 평가한 게 부러웠는지 모르지만 이 장관의 이번 평가는 오버도 한참 오버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