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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당의 진로와 맞물린 정계개편 논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대립이 격화되고 있다.
열린당 지도부가 당의 진로에 대한 의원대상 설문조사를 강행하겠다는 의지를 밝히자, 노무현 대통령은 ‘지도부나 의원만이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며 사실상 전당대회를 통한 진로 결정을 제기한 것이어서 갈등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노 대통령은 4일 ‘우리 모두의 책임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는 제목의 열린우리당 당원에게 드리는 편지를 청와대 브리핑에 게재, “당의 진로와 방향은 그 형태가 어떠하든 정책과 노선을 어떻게 변화, 발전시킬 것이지를 중심으로 논의되어야 한다”며 “이 문제는 당 지도부나 대통령 후보 희망자, 의원 여러분만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특히 “당헌에 명시된 민주적 절차에 따라 정통적이고 합법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면, 그게 정당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라면서 “당원으로서 당의 진로와 방향, 당이 추구해야 할 가치와 노선에 대해 당 지도부 및 당원들과 책임 있게 통론하고자 한다”고 말해 통합신당파가 주장하는 설문조사 방식에 반대의 입장을 밝히고, 전당대회 개최를 요구했다.
노 대통령은 또 “역대 정부에서 여당은 어려움에 처하자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통해 이를 해결하곤 했다”며 “이러한 차별화와 정부여당의 균열은 당 지지도나 대통령 후보 지지도를 올리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노 대통령은 “영남당도 호남당도, 지역당은 안 된다”며 “이른 바 ‘통합신당’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그리고 어떤 세력이 새롭게 참여하는지 들어보지 못했고, 다만 민주당이나 특정인문이 통합의 대상으로 거론될 뿐으로 결국 구민주당으로의 회귀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열린우리당이 대통령의 해외방문기간 정계개편 논의를 자제하자는 입장인 반면, 노 대통령은 해외순방 중에도 사전에 글을 써놓고 이날 청와대 브리핑에 올리는 기획력을 발휘하자 여의도에서는 국정은 뒤로하고 국내 정치싸움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푸념이 늘어가고 있다.
열린당 지도부는 노 대통령의 이 같은 입장 표명에도 불구하고 오는 6일부터 설문조사를 강행하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우상호 대변인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예정대로 설문조사를 진행해 여론을 수렴할 계획”이라고 답했다.
우 대변인은 “열린당은 창당 초심을 되살려 국민 여론을 수렴해 국민의 사랑을 받는 정당으로 거듭날 수 있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것”이라며 노 대통령이 당의 진로를 당 지도부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언급을 반박했다.
김근태 의장도 오전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당내 민주주의의 핵심은 토론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이라며 “당의 진로에 대해 합리적 토론을 거쳐 환골탈태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히며 설문조사 강행할 뜻을 비췄다.
반면 친노그룹의 김혁규 의원은 “당의 진로를 놓고 설문조사 방식으로 의견을 수렴하는 것은 난센스”라며 “친노냐 반노냐 하는데 초점을 맞추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 강화에 목적을 두지 않았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우리 정치를 왜소하게 하는 친노와 반노식 정계개편이 아닌, 국가 경쟁력 제고를 논의의 핵심으로 삼으면서 정체성 중심의 정계개편이 이뤄지길 소망한다”고 덧붙였다.
비대위원인 배기선 의원도 이날 성명을 통해 “한반도 평화 정착의 기틀을 마련해야 할 지금은 대통령을 흔들 때가 아니다”며 “정치적 입장 때문에 여당이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는 일은 국정의 공동책임장인 여당의 도리가 아닐 것”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