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검증체제 협의를 위해 방북한 미국 6자회담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의 평양 체류 일정이 연장돼 북한과의 협의에 진전이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힐 차관보는 당초 2일 귀환할 예정으로 1일 방북했지만 체류 일정을 연기했으며 3일 귀환할 지 여부도 불투명하다고 정부 당국자는 전했다.
이에 대해 외교 소식통은 “적어도 북한과 미국 간에 진지한 협의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지금까지 핵 검증 협상에 미온적이었던 북한이 협상에 성의 있게 나서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이지만 협상이 진전을 이룰 지를 예단하기는 이르다”고 말했다.
협상이 자신들의 뜻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서는 북한의 그동안 협상 스타일과 비교해 볼 때 미·북 협의가 긍정적으로 진행되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다.
실제 지난해 3월 베이징에서 열린 제6차 6자회담에서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가 불거졌을 때 북한 6자회담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조기 귀국한 바 있다. 또 이날 열린 남북 군사실무회담도 성과를 기대하기 힘들자 1시간 30분 만에 종료됐다.
북한이 힐 차관보를 초청했다는 점과 미국이 선뜻 제안에 응했다는 부분도 이 같은 관측을 가능케 한다. 힐 차관보가 원칙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유연한 협상안을 제시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미·북이 심도 깊게 의견 조율에 나서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다른 외교 소식통은 “북한이 미국이 제안한 내용에 관심이 없었다면 힐 차관보를 붙잡지 않았을 것”이라며 “검증방안에 대한 진지한 협의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며 북한이 미국 측에 검증체계와 관련한 역제안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일부에선 힐 차관보가 협상 상대인 김계관 부상을 넘어서는 고위관리를 만나기 위해 체류 일정을 연장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나 강석주 외무성 부상이 거론되고 있다.
앞서 숀 매코맥 국무부 대변인이 1일 브리핑에서 “검증체계에 변화를 준다든가 하는 관점에서 새로운 제안을 들고 간 것은 없다”고 말했지만 임기 말 외교적 성과가 절실한 미국이 북핵문제가 더 이상 악화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북한에 유연한 협상안을 제시했을 가능성이 제기됐었다.
한미 정부 당국자들도 미국 측이 핵개발 연관 지역과 시설에 대한 전면적인 검증 방침에서 한 발 물러서, 미신고 시설에 대한 사찰의 범위를 줄여 영변 핵시설로 검증 범위를 좁히는 등 기존보다 유연한 협상안을 제시했다고 전했다.
일각에선 대북 테러지원국 삭제와 관련해 북한이 검증원칙에 대해 미국과 잠정합의한 뒤 이를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 측에 제출한다면 6자 차원에서 공식 의결되기 전이라도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삭제하는 방안도 협상안 중 하나로 거론된다.
하지만 북한이 여전히 미국이 제시하는 샘플채취와 미신고시설의 방문 등을 ‘강도적 사찰’이라고 비난하며 받아들일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고, 선(先는)대북 테러지원국 해제를 요구하고 있어 협상 타결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미국도 국내 여론과 검증의 실효성 등을 감안해 ‘샘플채취’와 ‘미신고시설에 대한 방문’이라는 두 가지 원칙은 양보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대선이 임박한 상황에서 지나친 양보를 통해 북한에 끌려 다니는 인상을 보일 경우 비판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임기 말 레임덕 현상으로 인한 재량권도 크지 않다는 것이 외교가의 시각이다.
정부 당국자도 “힐 차관보의 평양체류 연장만으로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는 것은 위험하다”면서 “힐 차관보가 귀국한 뒤에야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우 한국국방연구원(KIDA) 국방현안연구위원장은 “힐 차관보가 북한에 조정된 검증체계 안을 가져간 것으로 보인다”며 “힐 차관보의 체류 연장은 북핵 협상의 파국을 원하지 않는 미·북이 좀 더 협상을 해볼 필요성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다만 “북핵협상의 진전에 대해서는 당분간 부정적”이라며 “미국과 북한의 협상의 큰 틀을 깨지 않고 서로 버티기를 하면서 돌파구 마련을 시도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