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땅 한국서 70여명 어르신 소중한 딸 되다

새하얀 겨울들판 따라 굽이굽이 이어진 시골길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충청남도 서산 효담요양원. 이 곳은 요양보호사인 탈북자 윤희순 씨(사진)의 소중한 일터로 그녀는 현재 이곳에서 70여 명의 어르신들의 손과 발이 되어주고 있다.


윤 씨가 서산 효담요양원에서 일한 지도 어느덧 4년 째. 그는 이제 요양보호사가 아니라 딸의 마음으로 어르신들을 보살피고 있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지금의 삶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북한에서는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쌀, 두부콩 등의 낱알을 팔았어요. 쉬지 않고 이 도시, 저 도시를 돌아다녀도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죠. 게다가 남편은 병을 앓고 있었고, 수재였던 아들의 과제수행비(한국의 학비 개념) 등도 마련해야 했기에 고민이 많았어요.”


윤 씨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중국에 가서 일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만 믿고 국경을 건넜다. 3, 4년만 열심히 일해 아이들의 학비와 장사밑천을 마련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말도 통하지 않고 신변도 보호되지 않는 중국에서의 돈벌이가 순탄치만은 않았다. 처음에는 밭일을 하며 중국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차츰 중국어가 익숙해지고 큰 어려움 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해져서야 식당에 취직할 수 있었다.


어렵게 얻은 일자리. 윤 씨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열심히 일했다. 식당 일을 내일처럼 여기며 앞장서다보니 식당주인도 윤 씨를 특히 좋아했다. 하지만 미처 몸을 돌보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무거운 음식들을 나르다보니 허리가 남아나질 않았어요.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없어 한쪽 손은 허리를 짚고, 나머지 한 손으로 음식을 날랐어요. 그러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식당 일을 그만 두고 치료를 받기로 했어요”라고 회상했다.


식당주인은 성실한 윤 씨를 놓치기 아쉬웠는지 치료를 마치고 다시 식당으로 되돌아와주길 당부했다. 윤 씨는 한 달간 치료를 받았고 상태는 호전되는 듯 보였지만, 몸 상태를 볼 때 식당 일을 다시 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윤 씨는 식당주인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온화하던 식당주인의 표정이 갑자기 무섭게 바뀌었다. 가족처럼 챙겨주던 식당주인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고 한다.


상처받은 마음 안고 한국의 품에 안겨


그는 “당시 식당주인이 한 달 월급을 보증금으로 갖고 있었어요. 일을 그만둘 때 돌려주기로 했었거든요. 그런데 그만둔다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제가 탈북했다는 점을 약점으로 삼고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하더라”고 말했다.


못 받은 월급도 안타까웠지만 무엇보다 믿었던 사람에 대한 상처가 너무나 컸다. 윤 씨는 시름시름 앓았다. 병명은 화병. 잠도 편히 잘 수 없었고, 음식도 넘길 수 없었다. 그만큼 마음의 상처가 깊었다. 한 번 이런 일을 겪자, 신변에 대한 불안함이 엄습해왔다. 더 이상 중국에서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던 중 한국에 먼저 가있던 시누이와 연락이 닿았다.


그는 “시누이가 한국에서는 신변도 보장해주고, 집도 주고 한다는 거예요. 먹을 걱정 없이 살만하다는 말에 중국에서 이러고 있을 바에야 한국으로 가자고 생각했죠”라고 말했다. 윤 씨는 한국에 함께 갈 사람들을 알음알음 모았다. 이들과 함께 브로커의 도움을 받아 라오스, 캄보디아를 거쳐 한국 땅을 밟았다.


지체 없이 바로바로 국경을 통과할 수 있어 탈북여정은 길지 않았지만 화병으로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힘에 부쳤다. 경사가 가파른 내리막길을 걷다 다리에 힘이 풀려 구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동료들은 윤 씨의 짐을 대신 들어주었고 마침내 무사히 한국에 도착했다.


2009년 5월, 윤 씨는 하나원을 수료하고 충남 서산에 터를 잡았다. 사람 많고 복잡한 서울이 싫었던 윤 씨에게 하나원에서 같은 방을 쓰던 친구는 서산을 추천해주었다. 먼저 하나원을 수료해 서산에 정착한 그의 친구가 조용하고 살기 좋은 지역이라고 전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서산에 정착한 윤 씨는 곧바로 일터로 뛰어들었다. 태안 멸치공장에 일손이 필요하다는 말에 멸치공장에서 5일, 서산 식당에서 한 달, 모텔에서도 한 달간 청소를 했다. 그러나 또 건강이 말썽이었다. 중국에서 무리하게 일을 해 오십견이 와 더 이상 식당일과 청소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새로운 일자리를 고민하던 때,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친구를 보며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작은 보살핌으로 큰 힘이 되어주다



요양보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정해진 교육을 이수하고 국가자격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이를 위 해 요양보호사 전문양성학원에서 교육과 자격시험을 함께 준비했다. 학원비가 부족했던 윤 씨는 바로 학원에 등록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만난 남편이 학원비를 보태주며 윤 씨의 새로 운 꿈을 응원해주었다. 또 남편은 북에 있는 두 아들을 그리워하며 외롭게 지내던 윤 씨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북에서는 경험하지 않은 시험제도가 낯설었고, 용어도 생소했지만 시험에 단 한 번만에 합격했다. 그는 “특별한 비결은 없었고요. 수업시간에 집중해서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틈나는 대로 내용을 반복해서 공부했어요. 요양보호사를 준비하시는 탈북자가 있다면 이 두 가지만 명심하면 될 거에요”라고 조언했다.


윤 씨는 요양보호사 합격소식을 듣고 곧바로 일자리를 찾았다. 마침 서산 효담요양원에서 요양보호사를 구하고 있었다. 요양원 측에서는 탈북자를 채용하는 것이 처음이라 걱정이 앞섰지만, 윤 씨는 성실함으로 이 같은 우려를 해소했다. 그동안 서산시장 표창과 효담요양원 원장 표창까지 받을 정도로 윤 씨는 어르신들을 부모님처럼 정성껏 보살피고 있다.


어느덧 윤 씨가 효담요양원에서 일한 지도 4년. 적응을 못하고 이곳저곳의 요양원을 옮겨 다니는 요양보호사들이 많지만 윤 씨는 처음 인연을 맺은 서산 효담요양원에서 어르신들과 즐겁게 생활하고 있다.


어르신들과 함께 지내다보면 가끔씩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각나 혼자 눈물짓는 날도 있다는 윤 씨. 하지만 효담요양원 70여 명의 어르신을 부모님이라 여기며 사랑과 정성으로 대하고 있다. 윤 씨에겐 70여 명의 어머니, 아버지가 존재하는 셈이다. 윤 씨는 “나의 삶에서 효담요양원, 그리고 70여 명의 어르신들과의 인연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 되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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