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계자’ 쟁취한 김정일, 물려받는 김정은

김정은은 28일 인민군 대장 칭호를 받으며 김정일의 후계자로 공식적으로 대내외에 존재를 드러냈다. 이로써 북한은 사실상 세계에 유례없는 3대 부자세습 국가의 길로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정일이 김일성으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았던 1970년대와 지금은 대내외 여건이 큰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향후 북한 체제의 미래는 더욱 불투명해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정일과 김정은의 세습 과정의 차이는 3대 세습의 연착륙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김정일이 아버지 김일성의 후광에 기대기보다는 치열한 권력투쟁 끝에 스스로 권좌를 장악했던 반면, 김정은은 철저히 최고 권력자인 김정일의 연출에 의해 후계자로 세워진 케이스다.


물론 김정은이 주위 형제들과 비교해 리더십 등 자질에서 두각을 나타냈다는 평가도 있지만 본인 스스로의 힘으로 후계자 자리를 얻어 냈다고는 보기 어렵다.


일단 김정일은 후계자로 지명되기까지 10여년 가까이 권력을 다졌던 반면 김정은은 정치 경력이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김정일은 대외적으로 후계자로 공개하기 전에 ‘당중앙’이라는 이름으로 7년간 정지작업과 우상화작업을 거쳤고, 공개된 이후에도 거의 14년간 권력기반을 굳힌 이후에 종합적인 지위를 모두 세습했다.


김정일의 정치경력은 김일성 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 조직지도부 부원으로 배속된 1964년 6월19일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그가 북한 권력내부에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1967년 5월에 열렸던 당중앙위원회 제4기 15차 전원회의였다.


1967년 5월 당 중앙위 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과 과장으로, 1970년 당 중앙위 선전선동부 부부장, 1973년 6월 당 중앙위 선전선동부 부장으로 거침없이 승진했다.


이후 1974년 2월에 열린 노동당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당내 핵심권력기구인 중앙위원회 정치위원이 되면서 후계자로 공인됐고, 이때부터 북한 내부에서는 그를 ‘당중앙’으로 호칭하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80년 10월 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는 김정일을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식 선포, 이미 1970년대 내부적으로 확정된 후계자 김정일을 외부에 공개했다.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식 선포되면서 김정일은 당 중앙위 위원, 정치국 위원, 정치국 상무위원, 당중앙 조직비서, 당 중앙군사위 위원의 직무를 겸임하게 됐고 1993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사실상 권력승계를 마무리하게 된다.


북한이 김정일을 내부적으로 후계자로 지명하고도 공식적인 공개를 몇 년간 늦춘 것은 김정일이 권력 기구와 핵심 간부들을 확실히 장악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정일은 우선 정치적 기반을 쌓은 뒤 후계자로써의 행보를 본격화 한 것이다.


이와 달리 김정은은 물망에 오른 지 2~3년도 채 지나지 않아 후계자로 공식 지명됐다. 그만큼 후계자로써 위치를 다지기 위한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정치 경험의 부족은 차치하더라도 지도층 내부에 대한 장악이나 권력 정당성면에 있어서도 불안정 요소가 많다고 할 수 있다.


김정일과 김정은 후계 세습 과정의 가장 큰 차이는 후계자 지위를 누구의 힘으로 얻었냐는 것이다. 노동당 비서를 지낸 황장엽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은 이미 10대 때부터 강력한 권력욕을 갖고 있었다.


대학 졸업 후 당 중앙위를 통해 정치에 입문한 김정일은 조직지도부에서 정부 행정의 전반적인 업무를 파악하기 시작한다. 김정일은 그의 어머니인 김정숙과 깊은 인맥관계에 있던 김일, 오진우와 같은 항일혁명세력에 기대 갑산파 숙청을 주도하면서 권력 중심을 향해 전진해 나갔다.


당시 김정일의 최대의 경쟁자는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였다. 김정일과 김영주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이르는 동안 김일성의 절대 권력화를 추구하며 ‘충성경쟁’을 벌였다.


이때부터 김정일은 김일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당의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한다는 명목으로 당내 사상투쟁을 벌리면서 문학예술을 통한 김일성의 개인숭배 캠페인을 직접 주도했다.


김정일의 권력투쟁은 1974년까지 지속돼 김일성의 신임과 함께 친인척들의 지지, 빨치산들의 지원을 받는데 성공한다. 동시에 점차로 영향을 확대해 나가는 계모 김성애 일파를 숙청했다.


또한 김정일은 1974년 4월 ‘당의 유일사상체계 10대원칙’을 내놓으면서 김일성 유일독재를 이론적으로 완성했고, 여기에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라는 이론을 곁들어 ‘김일성의 사상에 기초한 김정일의 영도’라는 권력구조를 만들어 냈다.


정치적인 입지를 다진데 이어 경제적인 업적을 만들기 위해 1974년 10월부터 12월까지 ‘속도전’이라는 구호를 제시했고, 시한부 대중혁신운동인 ’70일 전투’를 직접 지휘했다. ’70일 전투’의 성공적인 수행으로 당내에서 경제관리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으며, 김정일의 지도능력은 경제 분야로까지 확산됐다.


김정은도 후계자로 내정된 이후부터 군사, 경제 분야에서의 업적 쌓기에 나서고 있다. 지금까지는 평양 축포야회나 2012년 강성대국을 목표로 한 각종 건설사업 추진을 이끌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천안함 격침 사건 등 일련의 대남 도발들도 김정은의 주도로 이뤄진 것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대내외적으로, 특히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점에서 김정은의 이 같은 ‘업적 쌓기’가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외에도 김정일의 후계자 등장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김일성이 주도한 ‘내부작업’이다.


김일성은 당시 “공산주의자가 부자 세습을 할 수 있느냐?”는 대내외적인 비판 여론을 의식해 김정일의 갑작스러운 부각을 매우 경계했다. 이는 속도를 조절하며 후계자로서 김정일에게 업적을 차근차근 쌓도록 하는 기회가 됐다.


김일성은 김정일의 계략에 의해 노동당 내부에 실권자들이었던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와 당 조직지도부 부부장이었던 동생 김영주가 몰락하는 것을 묵인했으며, 1974년 2월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인되자 김영주를 당 내부 사업에서 손을 떼게 하고 부총리 직을 맡게 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자신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장성택 등에게 일을 맡겼을 때도 전적으로 위임한 경우가 없을 정도로 자신에게만 권력을 집중화하려는 특성이 있다.


따라서 후계자인 김정은에게도 일에 대한 위임은 하겠지만 어떤 형식으로든 개입과 간섭을 함으로서 김정은의 정치적 권력 위에 군림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


이럴 경우 권력 승계 자체가 원활히 이뤄지기 어렵고, 김정은의 입지가 좁아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도 김정일-김정은으로의 권력세습이 김일성-김정일로의 권력 세습보다 복잡한 과정을 거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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