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세계 지성인에게 드리는 편지

우리 민족은 수천 년 동안 운명을 같이 해온 민족이지만 2차대전의 종전을 계기로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북한은 소련식 사회주의 독재체제의 일원이 되고, 남한은 미국식 민주주의 진영의 일원으로 되어 남과 북은 첨예하게 대립해왔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남북간 차이는 천양지차로 벌어지게 되어, 북한은 기아와 빈곤, 인권유린이 지배하는 생지옥이 되었고 남한은 현대적인 민주주의 생활이 꽃피게 되었습니다.

남북간의 이러한 대립과 결과는 민주와 反민주간의 대립과 결과를 보여주는 전형으로서, 비단 우리 민족뿐 아니라 전 세계 인민들에게 커다란 교훈적 의의를 가집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민족의 문제는 국제적, 세계사적 관점에서 보아야 하며, 동시에 독재와 민주주의의 대립에 관한 경험에 기초해서 국제정세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냉전 승리 후, 反독재투쟁 포기

제2차 세계대전도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승리로 끝나기는 했지만, 소련 사회주의 진영과 자유민주주의 진영간의 대립을 내용으로 하는 냉전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한 것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냉전(Cold War)에서의 승리는 과거 민주와 반민주간의 투쟁과는 달리 열전(Hot War)에까지 이르지 않고, 다시 말해 총 한 발 쏘지 않고 승리했다는 점에서 위대한 역사적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데로부터 승리에 도취하고 자만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국제적인 견지에서도 그렇고, 한국 내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그 결과 오늘의 상황은 매우 위험한 지경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먼저 국제적으로 보게 되면, 미국을 비롯해서 승리한 나라의 정치인들, 지식인들이 자유민주주의가 체제의 경쟁에서 종국적으로 승리한 것처럼 생각하면서 독재를 반대하는 투쟁을 포기했습니다.

이들은 독재세력과 반민주세력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과소평가하고, 포용정책으로 그들을 능히 소화할 수 있다는 교만한 생각으로 독재세력과 반민주세력을 반대하는 투쟁을 포기했습니다.

▲ 9.11.테러 모습

그러다 보니 국제적 범위에서의 민주주의 동맹은 그들이 투쟁해야 할 대상을 잃어버리게 되면서 유명무실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국제적 경향은 한국 내에도 영향을 주어 반민주 세력의 장성을 억제하고 반대하는 투쟁을 약화시켰습니다.

남북 체제경쟁 아직 안 끝나

오늘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일면성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세력은 그 역사적 제한성을 극복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에서는 더욱 심각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경제발전에 비해서 정치 사상적 발전이 뒤떨어져 있고, 민주주의적 정치문화가 뒤떨어져 있는 관계로 오늘의 현실을 올바로 보지 못하는 경향이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경제분야는 외자 도입, 선진기술 도입 등의 방법을 통해 빨리 발전할 수 있지만 사상적인 정치문화 수준과 민주주의적인 정치문화 수준은 사람 자신이 체험을 통해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 발전에는 일정한 시간과 목적의식적인 노력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런 기간이 매우 짧았던 관계로 한국에서는 경제에 비해 사상・정치문화가 뒤떨어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마치 한반도에서도 체제경쟁이 끝난 것처럼, 북한에 대해 한국이 이미 승리한 것처럼 생각하면서 대북포용정책, 화해협력정책을 내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일부 정권욕에 사로잡힌 정치인들은 이러한 경향에 편승하여 대북 포용정책을 주장하면서 군중의 변화를 자기들의 정치적 지지기반을 마련하는 데 이용하게 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심화되어 갔습니다. 그 결과 한국은 남과 북의 체제대립과 역량관계를 원칙적 입장에서 정확히 보지 못하고 적아(敵我)를 구분하지 못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대중영합 정치, 여러 나라에서 발견

이것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민주주의 동맹이 범한 과오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민주주의는 완성되지 않았고, 민주주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역사적으로 민주주의 시대가 완성되려면, 세계가 민주화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 반드시 필요한데, 많은 사람들이 마치 민주주의 시대가 이미 완성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오늘날 민주주의 정당들이 독재세력과의 원칙적 투쟁을 포기하고 정권을 잡기 위해 여론에 영합하는 형태로 타락한 것은 한국뿐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로 관찰되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국제적인 경향은 한국에서 특히 심화되어 적대세력인 북한과의 화해협력을 주장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를 통해 결국은 친북 반미세력이 한국에서 장성하는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국제적 견지에서 남북관계 봐야

남과 북의 관계에서 과연 북한은 완전히 항복을 했다고 볼 수 있는가? 그건 아닙니다. 북한이 멸망에 직면했다고 하지만 경제적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으면서도 북한은 무력의 견지에서 볼 때 남한보다 강한 군사력을 유지해왔습니다. 경제면에서는 남한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무력에서는 북한이 의연히 우세를 지켜왔습니다.

물론 남북의 무력 역량을 동맹관계와 결부해서 보면, 상황은 약간 다릅니다. 한미동맹이 튼튼한 경우에는 남쪽이 무력에서도 우세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미동맹이 약화되고 북한에 대한 일방적인 포용정책을 실시하는 조건에서는 북한이 더 유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북한의 가장 큰 약점은 경제력인데, 한국이 경제와 외교를 도와주는 셈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북한과 직접 국경을 접하고 있는 중국은 욱일승천의 기세로 장성해가고 있으며, 러시아 역시 국력을 회복해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북한, 중국, 러시아의 동맹은 강화되는 추세인데 비해 한미동맹은 약화되고 있으며 한일공조 역시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들을 감안하면 중국과 동맹을 맺고 있는 북한의 영향력이 한국에 미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일부 정치인들이 북한과의 화해협력을 추구한 것을 계기로 급속하게 친북 반미세력이 장성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중국과 동맹한 북한의 영향력이 한국에 미치는 것은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런 국제적인 견지에서 남북관계를 보고 있지 않습니다. 엄연히 중국과 북한, 미국과 한국의 대립이 냉전시대 대립의 연장으로서 존재하는데도, 그것을 무시하고 냉전이 끝났다는 주장만 반복하면서 “이제는 한국이 독자적으로 발전해야 한다, 북한에 대해서는 포용정책을 실시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승리에 도취하여 이렇게 역사발전을 잘못 보고 정치와 사상이 옳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비단 한국뿐 아니라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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