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선생이 남긴 인간중심철학의 과제

우선 고 황장엽 선생과 관련된 사사로운 이야기로부터 시작해보도록 하자.


2001년 사회철학관련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마칠 무렵 나는 통일정책연구소에 입사하게 되었고 황장엽 선생이 2003년 11월 연구소를 떠나시기 전까지 주관하시던 철학세미나에 매주 참가하였다. 그리고 연구소를 떠나신 후로도 매주 비공식적으로 개최되는 철학세미나에 지속적으로 참여해왔다. 그간 내가 한 일은 주로 선생님의 철학서적 집필 과정을 보조하면서 인간중심철학관련 토론을 진행하는 일이었다.


10여 년의 시간 동안의 만남을 통해 내게 선생님은 무엇보다도 학자로서의 충실성과 ‘큰 정신’을 몸소 보여주신 분으로 기억되고 있다. 엄청난 개인적인 고통 속에서도 ‘개인의 생명보다는 가족의 생명이, 가족의 생명보다는 민족의 생명이, 민족의 생명보다는 인류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북한민주화와 인간중심철학의 개척을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하신 분이었다.


북한문제가 진보-보수의 시금석으로 기능하는 우리의 현실로 인해 그간 북한문제에 대한 선생님의 입장이 우리 사회에서 많은 논란과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사실상 인간중심철학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관심과 논의가 부족했다고 생각된다.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과 더불어 북한문제가 치열한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우리 사회의 논의 지형으로 인해 이러한 결과가 빚어진 데 대해서 개인적으로 아쉬운 감정을 갖게 된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선생은 북한 주체사상의 철학적 토대를 제공하신 분이다. 북한의 주체사상은 대략 주체철학, 마르크스주의적 계급주의, 수령론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선생은 인간중심의 주체철학을 개척하는데 기여하였으나 북한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이는 북한의 수령절대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논리로 정치적으로 오용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남행(南行) 이후 선생은 수령절대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북한의 주체사상과 구별하여 자신의 철학체계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면서 인간중심철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다.


인간중심철학은 철학의 사명을 ‘인간 운명개척의 길을 밝히는데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데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매우 강한 실천성을 가지고 있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론을 위한 이론이나 지식을 위한 지식을 배척하고 인간의 운명개척에 이바지하려는 실천성이 깊이 깔려있는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중심철학의 전체 체계 역시 이러한 철학의 사명에 입각하여 구성되어 있다.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일반적 특징, 인간의 본질적 특징, 세계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지위와 역할을 정확히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면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가 어떠한 세계이며, 주체인 인간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인간이 세계 속에서 가지는 지위와 역할은 무엇인지를 반드시 밝히지 않을 수 없는바, 이것이 바로 인간중심철학이 제시하는 철학의 기본적인 과제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제들에 부응하여 인간중심철학의 전체 체계가 구성된다. 세계의 일반적 특징을 밝히는 작업이 세계관으로, 인간의 본질적 특징을 밝히는 작업이 인생관으로, 세계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지위와 역할을 밝히는 작업이 사회역사관으로 구체화 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몇 차례의 개정작업을 통해 시대정신 출판사에서 발간된 『세계관』, 『인생관』, 『사회역사관』 3부작은 인간중심철학 체계 전체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중심의 원리라는 출발점에 입각하여 자신의 철학 체계를 폭넓게 제시하고 민주주의 정치철학을 통해 그 실천적 지향점을 제시하고 있는 인간중심철학은 몇 가지 측면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관심을 요구하고 있다.


먼저 이 철학은 철저히 우리 자신의 현실에 기반을 두면서도 인류의 보편적 문제 해결을 모색한 대표적인 자생적 철학체계로 평가될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 민족의 근현대 철학사를 정리한다는 철학사적인 관점에서 이에 대한 연구는 반드시 필요할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북한 주체사상의 오류나 과거 사회주의 사상이 가졌던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성찰하는 데서 인간중심철학에 대한 연구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차원을 넘어서도 인간중심철학 자체가 고유한 체계적 이론구상을 제시하고 있고 원칙적인 중요한 철학적 통찰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마지막으로 향후 인간중심철학에 대한 연구와 그 자체의 발전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노력이 매우 중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역사적으로 볼 때 인간중심철학은 북한이라는 매우 폐쇄적인 공간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남행 이후에도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폭넓은 이론적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인간중심철학 자체가 세계민주화를 지향하는 철학이고 오늘날의 삶이 급속한 지구화 과정에 놓여 있는 만큼 다양한 현대적 이론들과의 대화와 상호비판은 향후 인간중심철학의 발전을 위한 필수적인 요구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인간중심철학의 원칙적 통찰들이 구체화 되고 정당화 될 수 있을 때, 인간중심철학이 가지는 현대적 의미도 풍성하게 발굴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인간중심철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그 철학이 실천적으로 제시하고자 했던 과제들에 충실하려는 노력이 중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민주주의 정치철학이 제시하고 있는 실천적 과제는 크게 보아 북한을 민주화하고 북한 인민들을 구원하는 것, 개인중심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남한의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는 것, 나아가서는 이러한 노력들과 세계민주화 과정을 적극적으로 매개시켜 나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원칙적 과제들에 대해 이론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지속적으로 모색함으로써 실천철학으로서의 인간중심철학이 가지는 의미가 새롭고 풍성하게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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