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金부자에 충성’ 주장은 섣부른 판단”

지난 10일 타계한 고(故) 황장엽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에게는 생전부터 ‘2만 탈북자의 대부(代父)’ ‘북한민주화 운동가의 선구자’ 등의 수식어가 따라 다녔다. 북한 민주화 및 민족통일이라는 대의를 위해 최고 권력층으로써 누릴 수 있는 온갖 부귀영화를 뒤로하고 탈북을 결행, 마지막까지 북한의 1인 독재에 대한 투쟁에 앞장서 왔기 때문이다.


국가보훈처가 13일 황 위원장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하고, 국립대전현충원에 그를 안장키로 결정한 것도 이와 같은 평가가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황 위원장이 필생의 성과로 남긴 ‘인간중심철학’에 대한 평가를 생략한 채 북 정권의 ‘반체제 인사’ 정도로 평가하기도 한다. 심지어 혹자는 북한의 통치 논리인 ‘주체사상’을 창시했다는 전력을 들어 “훈장 추서가 부적절하다”는 주장마저 제기하고 있다.  


이와 관련 데일리NK는 황 위원장이 평소 “나의 사상적 동지”라고 소개해왔던 이광백(40) 자유조선방송 대표에게 황 위원장과 관련된 우리 사회의 논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이 대표는 소위 80년대 ‘주체사상파’ 출신이다. 학생운동 시절 북한의 대남방송이었던 ‘구국의 소리’를 녹취, 문건으로 제작 배포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경력이 있다. 하지만 지난 2001년부터 북한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어 현재는 대북단파라디오 방송국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이 대표가 이달 초까지 지난 10년간 황 위원장과 함께 사상이론 토론을 벌인 횟수만 총 250여회에 달한다. 황 위원장의 저서 ‘민주주의 정치철학’ ‘변증법적 전략전술론’ 발간 과정에서는 ‘토론자’로 함께 하기도 했다. 다음은 이 대표와 일문일답.
 
Q.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을 김일성이 창시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면서 내놓은 자주외교를 황 위원장이 사상적으로 발전시켜 놓은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황 위원장이 주체사상을 창시한 것이 맞나?








이광백 자유조선방송대표
이광백(이하 ‘이’)=주체사상은 사대주의와 교조주의를 반대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북한의 실상에 맞게 창조적으로 적용하려는 과정에서 출발했다. 황 위원장이 바로 그 작업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했다.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혁명과 건설을 추동하는 힘도 인민대중에게 있다는 명제로 주체사상을 전개한 것이다. 그것을 일반화하여 “사람은 세계의 주인이며 개조자”라는 철학적 원리를 밝혔다. 만약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것을 ‘창시’라고 할 수 있다면, ‘황 위원장이 주체사상을 창시했다’고 말 할 수 있겠다. 


Q. 일각에서는 황 위원장이 한국 망명 이후 북한 민주화 운동의 노력을 인정하면서도 북한에서 주체사상을 창시하는 등 북한 정권을 위해 적극 복무했던 것 아니냐는 이유를 들어 정부의 훈장 추서 등을 반대하고 있다. 어떻게 보는가?


=사람은 누구나 공과(功過)가 있다. 황 위원장의 이론 일부가 북한 독재자들에게 왜곡되고 이용당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황 위원장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류가 나아가야할 길이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해답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 북한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노구(老軀)를 이끌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앞장서서 투쟁했다. 그가 북한 정권에 사상적으로 이용당한 점이 있다해도 그것을 갚고도 남을 훨씬 큰 공(功)이 있다고 평가된다. 한국사회 뿐 아니라 전 세계에 북한 문제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북한인권과 민주화운동의 씨앗을 뿌리고 가꾼 사람이 바로 황 위원장이다. 북한이 ‘암살조’를 남파할 정도로 황 위원장의 활동을 두려워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겠나?    


Q. 황 위원장은 김일성의 사상담당 비서로 일했다. 그가 북한에 있을 때 자신의 사상이 수령중심의 주체사상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어떤 노력을 했나?


= 황 위원장도 자신의 사상이 왜곡되기 시작한 이후부터 적지 않은 정신적 고통을 겪었던 것으로 안다. 때문에 북한에서 나름대로 다양한 시도를 하셨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다만 황 위원장이 북한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입을 화(禍)를 우려해 그런 내용을 철저히 함구하셨을 뿐이다. 이것은 북한이 민주화된 이후에 밝혀질 문제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황 위원장을 평가할 때 꼭 고려해야할 점이 있다. 김일성-김정일이 개인 권력유지를 위해 ‘주체사상’을 전면에 내세우며 북한 내부를 무자비하게 통제하기 시작했던 순간, 학자였던 그가 북한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얼마나 됐을까? 심지어 마르크스-레닌주의조차 자유롭게 토론되지 못하고, 수령에 대한 비판과 지적이 금기시 되어 있는 북한 사회에서 자기 사상의 왜곡을 방어하는 행위 자체가 곧 정치적 생물학적 ‘자살’행위 아닐까?


Q. 주체사상이 수령절대주의로 변질됐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 핵심적 차이는 무엇인가? 주체사상에서는 수령을 위해 인민이 복무해야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하는데 원래 황 위원장의 주장과 어떻게 다른가?


= 황 위원장의 인간중심철학은 “인민대중이 나라의 주인이며 인민대중이 나라를 운영해야 한다”는 민주주의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황 위원장은 정치 지도자나 정당은 사회구성원들의 이익에 복무해야하며, 사회구성원들이 더 높은 지향점을 갖도록 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김일성과 김정일은 ‘수령이 인민대중의 이익에 복무해야 한다”는 전제는 교묘히 생략한 채, ‘인민의 대표는 당, 당의 대표는 수령이므로 인민대중은 수령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독재 논리로 나갔다. 서구 언론이 북한 주체사상을 ‘종교’로 묘사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북한에서 발행한 문헌과 자료를 보라. 한결같이 “인간은 수령에게 충성할 때만이 비로소 자주적 존재로 발전한다”고 주장한다. 인간 자체가 자주적 존재라는 황 위원장의 논리는 철저히 은폐되고 있다. 인간중심철학이 민주주의 원리를 기초로 전개되는 반면 북한 주체사상은 절처히 독재의 원리에 기초해 전개되고 있다.   


Q. 황 위원장은 국내에 입국한 이후 해마다 인간중심철학에 관련한 책을 발간해 왔다. 그가 한국에 들어와서 새롭게 성취한 사상적 성과는 무엇인가?


= 황 위원장은 자신의 철학적 원리 가운데 남한에 와서 가장 크게 발전한 부분을 ‘개인과 집단에 관한 원리’라고 밝혔다. 황 위원장은 “인간은 개인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집단적 존재”라는 명제를 한국에 와서 명확하게 정리했다고 스스로 밝혔다. 이 원리는 “각 개인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일하면서도 가족과 국가, 인류와 같은 집단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인생관’으로 확장됐다. 또 “개인의 이익과 국가의 발전을 균형있게 실현할 수 있게 개인중심의 민주주의와 집단중심의 민주주의를 결합하는 것이 민주주의 발전방향”이라는 정치철학으로도 발전했다.


Q. 진중권 씨 등은 황 위원장의 철학에는 민주주의적 요소를 찾기 어렵다고 말한다. ‘개인의 생명은 유한해도 집단의 생명은 영원하다’는 견해가 자유주의 정신에 정면 위배된다는 주장인데?


= 19세기에 등장한 민주주의 개념으로 황 위원장의 민주주의 사상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인류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주의 기본과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지만, 상당수 선진국과 일부 중진국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명제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들이 갈 수록 늘어나고 있다. 현대 민주주의는 ‘개인과 공동체와의 조화’라는 측면까지도 해결해야하는 숙제를 갖고 있는 것이다. 황 위원장의 민주주의 사상은 ‘개인중심 민주주의’의 약점을 ‘집단 민주주의’로 보완하고 있다. 그야말로 미래지향적인 진보적 이론이다. 따라서 진중권 씨와 같은 분들이 갖고 있는 민주주의 개념과 차원이 다르다.


Q. 황 위원장은 인간중심철학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황 위원장의 사상이론은 마르크스 유물사관의 ‘대안’ 정도로 볼 수 있는가? 차별성이 있다면 무엇인가?


= 인간중심철학을 마르크스 유물론의 대안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인간중심철학과 마르크스 유물론은 접근방법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유물론은 한마디로 객관세계(물질)의 본질과 운동성격을 규명한 사상이다. 인간중심철학은 인간의 본질과 창조적 활동의 가치를 규명한 사상이다. 한마디로 인간이 객관세계를 지배하고 개조할 수 있는 본질적 속성을 갖고 있음을 밝혀낸 것이다. 유물론이 ‘천동설’ 수준이라면 인간중심철학은 ‘우주 빅뱅이론’ 수준 이상이라고 말 할 수 있다.


Q. 황 위원장이 남긴 성과와 과제는 어떻게 계승되나?


= 황 위원장은 자신의 인생을 두 가지를 위해 바쳤다. 하나는 북한의 민주화였고, 또 하나는 인간중심철학의 연구발전이었다. 황 위원장은 한국에서 언론플레이나 정치활동을 극도로 꺼렸다. 사상이론 완성과 인재양성에 역점을 두었고, 북한민주화를 위한 조직건설에 집중했다. 본인은 늘 “자꾸 시간만 흐른다”고 안타까워 했지만 실제 아주 실속있는 활동을 벌인 셈이다. 그 결과 상당한 조직역량이 만들어졌다. 우선 그가 남긴 북한민주화의 씨앗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탈북자들과 현장 활동가들을 통해 계승될 것이다. 그리고 또 그의 사상이론을 계승 발전시킬 실력있는 연구자들도 충분하다고 본다. 장례 절차가 모두 마무리 되면 향후 활동방향에 대한 논의가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