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南行 10년…그에게 北민주화의 길을 터주라

오전 9시, 황장엽 선생은 베이징 주재 한국 총영사관 근처에 있는 호텔백화점으로 들어갔다. 기다리고 있던 (망명)안내자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곧바로 택시를 타고 한국 총영사관으로 향했다. “황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 황장엽 선생은 총영사가 내민 손을 잡았다. 몇 시간 후, 베이징 주재 한국 대사관은 중국 외교부에 황장엽 선생의 망명 사실을 통보했다. 1997년 2월 12일 오전 11시 30분이었다.

오늘은 황장엽 선생이 망명을 결행한 지 딱 10년이 되는 날이다. 김일성종합대 총장과 조선노동당 국제비서를 역임하고, 주체사상을 사실상 창시했던 황장엽. 그가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 그리고 함께 공부하고 일했던 수 천 명의 제자와 지인들의 희생을 무릅쓰고 망명을 결행한 이유는 무엇인가?

잔인한 폭력과 기만 속에서 고통 받는 인민을 위해 누군가는 나서서 비판하고 저항해야 한다는 양심 때문이었다. 노동자 농민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노동자 농민을 위한 이상사회를 건설해 놓았다고 선전하는 미친 사회를 구원해야 한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남한 동포들과 힘을 모은다면 김정일 독재를 끝내고 인민을 살릴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가 망명한 후, 그의 사랑하는 가족과 친척 114세대 500여명이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들을 수송하기 위해 열다섯 칸짜리 기차가 동원되었다. 할아버지 품에서 사탕을 사달라며 조르던 어린 손자손녀들도 기차에 올라야만 했다. 아내 박승옥 여사는 남편의 망명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딸은 정치범 수용소로 향해 달리던 기차에서 뛰어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정부도 그 이후에 들어선 노무현 정부도 황장엽 선생을 돕지 않았다. 오히려 음으로 양으로 황선생의 활동을 제약했다. 가족과 지인들의 희생을 대가로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좌절감에 시달리면서도 황장엽 선생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고통스럽게 투쟁하는 사이에 10년이 훌쩍 흘렀다. 망명 당시 75세였던 그의 나이도 어느덧 85세가 되었다. 지금도 그는 “지금 나에게는 죽을 권리도 없다. 마지막 힘을 다해 투쟁할 의무만 있을 뿐이다”고 말하며 김정일 독재 반대 투쟁의 맨 앞에 서 있다. 하루 한끼를 먹으며 정신을 가다듬고, 좌욕으로 육체를 단련하고 있다. 쉴 틈 없이 책을 쓰고, 토론하며 사람들을 조직하고 있다.

황장엽 선생이 투쟁해온 지난 10년은 햇볕정책으로 김정일 독재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 시간이기도 했다. 이제 우리 정부도 황장엽 선생에 대한 태도를 바꿔야 한다. 더 늦기 전에 모든 것을 헌신해 북한 인민과 민족의 통일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늙은 혁명가의 투쟁을 지원해야 한다. 북한의 민주화를 위해 마음껏 일할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민족공조이며, 가장 정확한 통일방도다. 새로 들어설 정권에게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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