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北민주화’, 남북 인권운동가의 몫으로…

믿기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뵈올 수도 없고, 말씀을 들을 수도 없게 되었다는 것이 한여름의 허망한 꿈만 같습니다. 내일이나 모레나 선생님과의 영이별을 문득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면 다시금 가슴이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산산히 흩어져가는 마음을 다잡아 선생님께서 주신 책들을 펴들었습니다. “최홍재 동지께”라고 써 주신 글귀가  제각각 꿈틀대며 제 가슴에 파고듭니다. 먹먹한 가슴에 붉은 망울이 맺힙니다. 이것은 선생님이 남기신 씨앗입니다. 이제 선생님이 가시다 채 못 가신 그 길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의 3대 수령세습독재에 유린당해 세상의 웃음거리로 전락한 인간중심철학의 진수를 드러내어 인류의 철학적 자산으로 되돌려야 할 중차대한 일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마지막 호흡이 멈추시던 순간에도 잊을 수 없으셨을 북한 형제들의 자유와 해방, 북한민주화의 대업이 우리들의 몫으로 남겨졌습니다. 인류의 사랑과 협력을 이루기 위한 마지막 투쟁의 과업이 남북의 인권·인류 옹호자에게 주어졌습니다.


선생님은 당신께서 보신 역사의 진리가 수령독재에 악용되는 고통을 견디기 어려워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인간이 수령독재의 부산물로 값없이 처분되는 것을 보며 지극한 휴머니스트이자 고뇌하는 지성인으로서 참기 어려운 나날을 보내셨습니다. 결국 알량한 수령독재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2300만을 노예로 삼고, 핵 놀음이나 벌이며 한반도와 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김정일과의 싸움을 결단하셨습니다. 1997년 한국행 결행을 앞두고 평생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살아오셨던 박승옥 동무와 러시아말로 나누셨던 마지막 대화를 저희들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개인의 생명보다 가족의 생명이 더 중요하고, 가족의 생명보다 민족의 생명이 더 중요하며, 민족의 생명보다 인류의 생명이 더 중요하다.”


지극히 사랑하셨던 사람들. 가족들, 제자들, 동료들을 죽음과 고통 속에 몰아넣을 선택을 앞두고 선생님은 부인께 이 말씀을 남기셨고 두 분은 말씀이 없으셨다 하셨습니다. 그것은 유언이자 한없이 죄스러운 이별사였고, 선생님 스스로를 굳게 다지는 선서였습니다.


이제 선생님은 더 이상 철학자로서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전무후무한 독재자와 최전선에서 싸우는 투사가 되어 한국에 오셨습니다. 선생님은 망명하신 적이 없다하셨습니다. 내 조국에 내가 왔는데 그 무슨 망명인가 하셨습니다. 선생님께 한국은 이질적인 그 어느 곳이 아니라 조국 그 자체였고, 북한을 민주화하기 위한 기지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오신 후 10년여 시간은 참담하였습니다. 선생님의 발은 묶이셨고, 말씀은 제지당하였습니다. 수령독재를 옹호하는 것이 진보인양 하는 해괴한 상황을 목도하며 가슴을 치셔야 했습니다. 이미 희생당한 사람들, 지금도 고통에 놓여 있을 사람들에게 죄스러운 마음을 밤마다 삭이셔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분 일초도 허망하게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쉼 없이 교육과 집필에 힘쓰셨고, 동지를 규합하셨습니다. 바짝 메마른 광야에 예언서를 묻고, 어느 사막이나 습지에서도 싹을 틔우고 힘차게 성장할 수 있는 씨앗을 준비하셨습니다. 씨앗들에게 언제나 꿈을 크게 가지라 하셨습니다. 아프지 말라 하셨습니다. 단결하라 하셨습니다. 못 해 낼 일이 없다하셨습니다. 안회를 돌보는 공자선생처럼, 손주들을 살피는 자상한 할아버지처럼 선생님은 그렇게 씨앗들을 아끼고 사랑하였습니다.


선생님은 밤마다 가끔씩 동화책을 읽으신다 하셨습니다. 그 속의 진리들을 음미하는 재미가 가득하다 하셨습니다. 책을 읽노라면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이 차분해진다 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생의 마지막 밤에 어떤 동화가 위안이 되셨을까요? 


선생님은 이제 짐을 내려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그 짐을 흔연히 이어 받고자 합니다. 우리의 정신은 굳세며 우리의 몸은 강건합니다. 북한을 민주화하고 세계민주화의 길을 열어가는 우리는 황장엽 선생님의 제자이자 동지입니다. 우리 속에서 선생님은 항상 존재하실 것이며, 자유와 창조의 길에 나서는 희망찬 북한동포들을 맞이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다짐이자 굳센 약속을 드리오니 고이 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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