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상상봉 “어머니 눈좀 떠보시라요..”

“어머니, 좀 보시라요..눈 좀 떠보시라요..엉엉엉..”

일흔을 훌쩍 넘긴 북녘의 딸들은 반세기가 넘는 생이별 끝에 화상을 통해 남측의 노모를 애타게 불러 보지만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노모의 모습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1946년 해방 직후 4남매 중 큰 딸 황보매(78)씨와 작은 딸 학실(76)씨만 신의주에 남겨둔 채 막내딸 봉숙(69)씨와 아들만 데리고 월남한 김매녀(98) 할머니.

김 할머니는 이후 여느 이산가족과 마찬가지로 남북 분단 고착화와 6.25 전쟁으로 인해 생사도 모른 채 두 딸을 평생 가슴에만 묻고 살아왔다.

김 할머니는 15일 59년만에 비록 화상을 통해서나마 북녘의 두 딸과 재회했지만 지난 해 갑작스럽게 찾아온 뇌졸중으로 두 딸을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김 할머니는 입을 오물오물 거리며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오매불망했던 두 딸과의 상봉을 아는 지 모르는 지 고개만 흐느적, 흐느적하며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다소 담담하던 모습의 북녘의 딸들도 59년만에 만난 노모의 이 같은 모습에 “어머니, 좀 보시라요..어머니 눈좀 뜨라요”라며 통곡을 시작,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이를 지켜보던 남측의 막내딸 봉숙씨는 “어머니 말 한마디만 해보세요”라며 안타까움을 표시했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북녘의 딸들과 남측 가족들은 “상봉이 작년에만 이뤄졌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라며 아쉬움을 달래야만 했다.

또 가족들은 김 할머니가 건강할 때 찍은 가족 사진을 보며 나머지 가족들에 대한 대화 등으로 화기애애한 얘기꽃을 피웠다.

김 할머니는 지난 해 쓰러진 후 의식은 있지만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로 이날 서울 남산동 대한적십자사에 마련된 화상상봉장에도 앰뷸런스를 타고 왔다.

이 때문에 이날 상봉장에는 의료진이 김 할머니의 상태를 계속 체크하며 상봉시간 내내 비상 대기했다.

김 할머니는 지난 해 쓰러지기 전 “큰 딸은 시집이라도 보내고 왔는데 작은 딸은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고 반세기 넘는 마음의 짐을 털어놓기도 했다는 후문이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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