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진표 씨 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추천에 대해

I.
국가인권위원회법 제2조에 의하면, 인권이란 ‘헌법 및 법률에서 보장하거나 대한민국이 가입·비준한 국제인권조약 및 국제관습법에서 인정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자유와 권리’라고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처럼 인권에 대한 어려운 정의를 떠나 사회 구성원이 체감할 수 있는 인권의 의미로는 ‘화병에 걸리지 않는 사회’를 기초적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경찰이나 검찰에서 피의자를 고문한다면 설사 자신이 피해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화가 치밀게 마련이다.


그러나 한국은 정치와 언론 분야에서 일반적으로 자유로운 나라로 판정받고 있다. 즉 국민이 화병에 걸릴 만큼 거친 인권유린이 국내에서 자행되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프리덤하우스는 한국을 정치적 권리에서 1등급, 시민적 자유에서 2등급으로 분류하고 있으며 이 수준은 일본과 같다. 북한은 전 세계 두 분야에서 모두 7등급으로 세계 최하위를 기록하였지만, 북한의 경우 등급이란 이미 모든 의미를 상실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북한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이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 중국은 정치적 권리에서 7등급, 시민적 자유에서 6등급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화병에 걸리지 않는 사회만으로 인권이 온전히 보장되는 사회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는 특별한 생각 없이 하고 또 받아들이는 관행 중에서도 인권유린이라고 볼 수 있는 행태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여성이 임신과 육아 그리고 직장생활을 병행하기 위해서는 여성들에게 더 섬세한 배려가 있어야 하며, 이러한 배려가 없을 경우 우리는 그것을 여성의 사회참여 가능성을 제한하는, 일종의 평등권 침해라고 판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인권위원회는 화병이 걸리지 않는 사회를 만듦과 동시에, 생활수준과 시민의식이 고양됨에 따라 더 민감해질 수밖에 없는 사회내의 각종 차별 및 재원분배와 관련하여 매우 섬세한 인권의식을 고취시키고 실현시킬 의무가 있다. 필자는 인권에 대한 이런 상식적 이해에 좌우가 따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II.


유감스럽게도 11월 초 국가인권위원회의 두 명의 상임위원, 1명의 비상임위원이 임기종료를 얼마 안 남기고 사퇴를 하였다. 이어서 60여 명의 전문위원들도 뒤따라 사퇴를 하였다. 공식적으로 이들이 밝힌 사퇴의 이유는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의 독선적 운영에 있다고 하지만, 상임위원회 보다 전원위원회의 운영을 중요시하려는 비상임위원들의 시도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라는 보도도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어떻게 운영되는 지에 대해서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는 필자로서는 솔직히 이번 사태에 대해서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번에 사임한 상임위원 중에서 국회의 여당 추천을 받은 문경란 씨의 후임으로 홍진표 시대정신 편집인이 내정되자, 좌파언론에서는 국가인권위원회를 ‘북한인권위원회’로 만들려는 이명박 정부의 의도가 들어났다고 하면서 홍 편집인을 ‘정치적으로 편향된, 인권위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라고 연일 거친 비난을 퍼붓고 있다. 심지어 그를 ‘반북인사’라고 규정하면서 이런 인물이 상임위원에 추천된 것을 ‘귀에 말뚝을 박은 자’만이 할 수 있는 한심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김정일 정권에 반대하는 인물은 인권과 관련해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는 참담한 주장들이다.


“최근 국제사면위원회는 북한이 강제송환된 탈북자를 공개처형까지 한다고 보고했다. 정치범을 수용한 관리소에서는 식량부족으로 숨지는 사람도 나온다고 했다. 인권위는 인도적 대북지원사업을 정치사안과 분리해 지속하라고 정부에 요구하면서 왜 인간적 삶의 가장 기본이 되는 인권에는 침묵하려 하는가. 더 이상 북한 인권개선을 위한 정당한 요구와 평화적인 압력을 미룰 수는 없다. 남쪽에선 사사건건 인권잣대를 들이대면서 북한에 대해서는 저자세로 일관하는 한 인권위의 존재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만 깊어간다는 점을 명심하라.”


위 글은 2006년 12월 중앙일보에 게재된 사설 “반인권적 결정내린 한심한 인권위”로서 바로 이번에 사퇴한 문경란 씨가 쓴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위 사설에서 당시 국가인권위원회의 ‘북한인권눈감기’ 행태가 바로 우리 사회를 화병 걸리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더 이상의 설명 없이도 느낄 수 있다. 홍진표 편집인의 북한인권에 대한 생각도 사실 위의 논설처럼 매우 상식적일 뿐이다.


III.


이처럼 홍진표 편집인의 상임위원 내정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국가인권위원회가 북한인권문제를 주요 의제로 다루는 것을 ‘말도 안 되는 일’로 생각하고 있다. 비상임위원이었다 이번에 임기를 얼마 남기고 사퇴한 조국 서울법대교수는 홍 편집인이 상임위원이 되면 국가인권위가 북한인권위로 변질되고 국내인권은 등한시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왜 이런 화통 터지는 발언을 인권을 그렇게 존중하는 자들이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까?


이들의 주장에는 대략 세 가지 근거가 따라 붙는다. 첫째, 한국의 우파는 북한인권을 정치적, 정략적으로 이용하고 있을 뿐 실제로는 북한 인민의 인권향상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국회의 북한인권법 통과를 반대하고, 올해 2월 국가인권위원회의 통과 권고도 절차상의 하자가 있다면서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우파가 북한인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면 그 정치적 목적은 무엇일까? 북한정권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 우파의 정치적 목적이라서 북한 인권을 외면한다면 인권유린 정권을 비판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해야 할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대한민국 국가기관의 인권침해에 대해서도 침묵해야 맞다. 대한민국 국가기관의 인권침해 제기에는 또 무슨 정파의 ‘정부 비난 의도’가 개입됐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북한정권의 인권유린을 변호하는 한국의 친북․종북세력에 대한 비판이 우파의 정치적 목표라면, 이것 역시 문제의 원인을 그들이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무런 설득력도 없다. 친북·종북세력이 북한인권에 대하여 눈감지 않는다면 이런 정치적 목표는 상상도 불가능하다.


둘째, 우파는 북한인권문제를 제기할 자격이 없다는 주장이 있다. 예를 들어 70년대와 80년대 권위주의 정권 하의 인권유린에 대해서는 가만있다가 민주화가 성취된 이후에야 고개를 들고 나와 북한인권 운운하고 있다는 것이다. 홍진표 편집인의 이력을 볼 때 그가 지금까지 배부르고 등 따습게 살다가 북한인권운동에 뛰어들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닐뿐더러, 70년대, 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가한 사람만이 앞으로 인권운동을 할 수 있다면, 한국에서 인권운동은 50세가 넘어서야 시작할 수 있다는 궤변을 피할 수가 없다.


셋째, 우파의 북한인권문제 접근법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들은 북한인민의 시민적 자유권이 아니라 식량권을 보장하는 것이 급선무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정부가 무조건 북한에 식량원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이런 무조건 원조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두 반인권적이라고 주장한다. 또 1991년 체결된 남북합의서의 내정문제불간섭 규정을 예를 들면서 북한인권에 개입하는 것은 북한의 주권침해라는 것이다.


북한인민에 대한 식량원조는 사실 매우 필요하지만, 북한정권이 식량원조의 거의 전부를 가로채어 일부 지배층과 군대로 보내고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다른 한편 한국에서 주는 식량원조가 궁극적으로는 북한의 장마당에 공급을 늘릴 것이라는 점도 사실이다. 따라서 북한에 대한 식량원조에 대하여 그 필요성을 이해하지만 북한정권의 가로채기를 줄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고, 또 북한정권이 가로채리라는 점을 알지만 북한인민에게 식량원조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분명하다. 이것이 우파 내에서도 의견이 통일되고 있지 않은 북한식량지원에 대한 현실이지만, 북한인민의 삶을 도외시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다른 한편 과거 좌파정권에서 국가인권위원회는 정치범 수용소, 노동단련대, 공개처형 등 북한인민의 참담한 인권유린은 내정간섭이라는 이유로 외면하면서, 북한인민의 식량권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무조건 원조를 주장하였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북한정권이 어떤 짓을 하여도 옹호하는 것을 넘어서, 사태의 변화가 없으면 우리가 아직 덜 주었기 때문에 북한정권이 안심을 못하고 있으나 더더욱 주자고 친북좌파들은 주장한다. 바로 이런 국내외의 친북좌파로 인해 김정일 정권의 오만은 극에 달하였고 그 결과 핵개발과 천안함 폭침과 같은 한반도 평화흔들기를 마음 놓고 자행하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친북좌파 스스로가 북한인민의 인권유린의 주요한 구성요소이며, 과거 국가인권위원회는 북한인권에 대한 지연작전, 법리 따지기 등 사보타지와 태업을 통해 한국에서 북한의 이미지가 추락하는 것을 막는 요추기관으로 이용되었다. 요행이라고 할까, 바로 이 기간에 북한인권개선을 위한 국제사회의 집요한 노력으로 평양 근처에 있던 정치범 수용소 몇몇이 정리되었다는 소식도 있다.


IV.


인권문제는 자신들이 독점한 양, 흰 것을 검다하고 검은 것을 희다고 말하면서도 천하에 거릴 껏 없이 당당한 일부 좌파인사들을 보고 필자는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 이제 ‘화병나지 않게 하는 사회’라는 말에서도 중요한 점은 누가 화병에 걸리느냐는 것이 되었다. 우파는 북한인권의 중요성을 우선 강조하고 좌파는 국내인권의 ‘파인튜닝’을 애써 강조한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인권위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첫째, 역설적이지만,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의 인권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북한인권만이 중요한 것도, 국내인권만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어느 한 쪽만을 비정상적으로 강조할 경우 국가인권위원회는 좌우 이념대립으로 인해 설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실제로 한반도의 인권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남북 모두에서 인권의식이 지금보다 훨씬 더 고양될 필요가 있다. 둘째, 우리 사회 전반의 인권의식 개선을 위해서는 국가기관에 의한 인권유린을 넘어서서 국가인권위원회의 활동을 넓혀야 한다. 폭력시위에 의해 수많은 경찰이 부상을 당해도 오직 경찰의 인권유린만을 문제 삼는다면, 바로 국가인권위원회가 국민의 화병을 키우는 장본인이 될 뿐이다. 셋째, 국가인권위원회 내부에서 좌우대립이 생길 경우 어느 누가 일방적으로 이길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런 점에서 홍진표 편집인의 상임위원 내정을 필자는 사실 매우 기쁘게 생각하였다. 광우병 촛불시위가 휩쓸고 지나간 2008년 겨울, 그와 나는 다른 두 명의 공동저자와 함께 책『거짓과 광기의 100일』을 썼다.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 책도 홍진표 편집인을 비난하는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관여한 책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지만, 이 책은 광우병 발생 원인과 전개과정을 2003년부터 추적하여 공시적․통시적으로 심층분석한 유일한 서적이다. 당시의 촛불시위를 미화하면 선이요, 비판하면 악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은 아마 눈의 가시일 것이다. 그러나 홍진표 편집위원은 이 책에서 객관적 사실 규명에서 시작했고 객관적 사실 규명으로 끝을 냈다. 그가 나중에 펴낸 『친북주의 연구』에서도 사실판단의 중요성과 함께 그가 비판하고자 하는 친북좌파의 한계를 분명히 제한함으로써 민주주의 사회를 같이 끌고 갈 정상적 진보세력에게 ‘친북좌파’라는 표현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2009년 세계인권의 날인 12월 10일 국가인권위원회는 북한민주화네트워크에 대한민국인권상을 수여하였다. 이 네트워크를 만든 사람은 과거 운동권 시절 한국의 주사파 운동을 끌어왔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애가 끊어지는 아픔과 가치관의 완전한 전도가 가져오는 우울을 견디면서 북한의 민주화 없이는 한반도의 평화와 민주화가 실현불가능하고, 동시에 대한민국의 정상화, 선진화가 이 꿈을 실현하는 모태임도 같이 확인했다. 이들이 이처럼 어려운 길을 걸어온 동기가 개인의 명예욕에 있지 않음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필자가 지난 몇 년을 두고 볼 때, 한 줌의 정파적 이념대립도 이들의 관심은 아니다. 이들은 휴전선 너머 북한인민의 어두운 삶에 죄의식을 느끼고, 화병이 났기 때문이다.


바로 이 영예로운 인권상을 수여한 북한민주화네트워크를 만든 한 사람으로서 홍진표 편집인이 국가인권위원회가 요구하는 무거운 소임을 맡아 소아적 이념대립이라는 안경을 코끝에 걸고 사물을 바라보지 않으리라는 점, 그것은 그가 살아온 지나온 삶이 담보하고 있다고 필자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