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한 속의 구사일생…폭설로 8명 동사

2001년 1월 7일,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전날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폭설은 아침에 우리가 일하러 나갈 때까지도 내리고 있었다.

당연히 오늘 작업은 눈치우기라고 생각했는데 교화소 전체적으로 교화반마다 원목을 잘라오라는 과제가 할당됐다. 우리 반은 각자 도끼와 하산바를 착용하고 무릎까지 차는 눈을 헤치며 10리 밖에 떨어진 원골로 향했다.

나무들이 있는 골짜기 안으로 올라가려면 시간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에 우리는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무릎까지 차는 눈 때문에 행군이 늦어져 오전 11시 30분이 다 돼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다리의 느낌이 이상해서 만져보니 신발과 바지 하단 틈으로 눈이 들어와서 무릎 아래까지 눈덩이가 얼어붙어 있었다.

작업을 시작한 지 반시간쯤 지나자 함박눈이 빗방울과 섞인 진눈깨비로 변했다. 삽시에 우리들의 옷이 젖어들었다.

진눈깨비 때문에 모닥불도 피우지 못한 채 덜덜 떨면서 선 자리에서 밥 한 덩이씩 까먹고 계속 작업에 몰두했다. 그런데 작업이 끝나고 하산길에 나서자 진눈깨비가 멎더니 갑자기 세찬 칼바람이 마주치면서 우리들의 옷을 삽시간에 빳빳하게 얼려놓았다.

그럭저럭 힘을 쓰면서 원골에 도착하니 온 교화반 죄수들이 골짜기에 꽉 들어차 쉽게 산을 내려갈 수 없었다. 그렇게 서로 밀고 당기면서 산골짜기를 빠져나오니 이미 오후 4시가 넘어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조바심이 난 각 교화반 관리들과 초병들이 죄인들을 닦달하며 악을 썼다. 국물도 없는 얼음덩이 주먹밥 하나로 끼니를 때웠던 죄인들은 칼바람을 마주하고 통나무를 끌다보니 모두가 지쳐 있었다.

나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면서 기운이 없어지고 빳빳하게 얼어붙은 바짓가랑이 때문에 걸음을 떼는 것조차 힘겨웠다. 죄수들은 반을 구별할 수조차 없이 서로 엉키고 엉켜 오합지졸이 되어버렸다.

나무는 바닥에 얼어붙어 끌리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나무 위로 자기 나무를 끌고 다니니 여기저기서 비명소리와 초병들의 욕설이 난무했다.

시간은 점점 흘러 앞사람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일 정도로 해가 기울어버렸다.

이때부터 탈진한 죄인들이 하나둘씩 주저앉기 시작했다. 교화소까지 아직 절반도 가지 못했는데 해는 떨어지고 죄인들이 주저앉기 시작하니 각 반의 간부들이 모두 반별로 죄인들을 집결시키고 고함을 질렀다.

“모두 나무를 버리고 그냥 내려가라! 서로 부축하면서 내려가라! 추울수록 서로 팔이라도 껴야 한다!”

벌써 운신도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자 당황한 관리들은 반장과 조장들을 불러 낙오되는 사람들을 업고 내려가라고 지시했다. 나도 하산바를 벗어버리고 얼어서 운신을 못하는 광호를 둘러메고 걸음을 재촉했다.

내가 지치면 반장이 광호를 업고, 반장이 지치면 내가 광호를 업으면서 발걸음을 옮겼지만 나와 반장도 곧 지치고 말았다.

몸이 허약했던 사람들은 몸이 얼어붙어서 걸음걸이가 느렸고, 힘 좀 쓴다는 사람들도 낙오자를 업고 내려가는 바람에 이동속도가 느렸다. 그때 교화소에 남아 있던 관리들과 초병, 위생원, 배식공 및 신입반에서 대기하던 43명의 죄인들이 우리 대열에 도착했다.

그들에게 내가 업고 있던 광호를 넘겨주자 나에게도 탈진 증세가 찾아왔다. 앞서가는 반장의 좌우로 오락가락 비틀거리는 모습은 술에 만취한 것처럼 보였다.

반장도 입이 얼어 말을 못하고 둘이 겨우겨우 의지하여 걸음을 재촉하는데 마침 농장반에서 끌고 올라왔던 얼룩소 한 마리가 임자도 없이 혼자 뚜벅뚜벅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반장과 나는 소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어서 내려왔다.

그렇게 겨우겨우 교화소 철문 앞에 도착하니 반마다 인원 점검을 하는 절차도 생략된 채 오합지졸이 된 죄인들이 꾸역꾸역 교화소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감방에 들어가니 다른 죄인들이 입에 따뜻한 물을 부어주며 밥을 먹여줬다. 배식해 놓은 지 오래된 밥이라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 밥이라도 뱃속에 밀어 넣으니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7명의 죄인들이 혼수상태였다. 시간은 밤 10시를 넘어가고 있었지만 복도에서는 위생원들과 담당 관리들의 발걸음 소리 때문에 몹시 소란했다.

반장과 나는 정신을 차린 사람들과 함께 아직도 꼿꼿하게 얼어있는 7명의 몸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감방 안 죄수들 모두가 달려들어 굽어 있는 팔다리를 펴니 여기저기서 ‘두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취사장에서 가져온 더운 물을 먹이려고 했지만 얼어붙은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우리 감방 관리가 “야, 이 새끼들아. 이빨을 부수고라도 물을 먹여!”라고 악을 썼다.

나는 숟가락을 이 틈에 끼워 넣고 비틀었다. 이가 깨진 틈으로 겨우겨우 더운 물을 흘려 넣었다. 그렇게 7명에게 더운 물을 먹이며 온몸을 주물러주자 얼굴에 온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새벽 2시가 되어서야 7명의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날 교화소 죄인들 총 47명이 추위로 의식을 잃었고 8명이 사망했다. 손과 발에 동상이 걸린 사람들은 셀 수도 없었다. 나도 오른쪽 엄지발가락이 동상에 걸려 발톱이 다 빠지고 말았다.

죽은 8명 중에는 상하차 교화반의 리 모 씨도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날 오후 그의 어머니와 아내가 면회를 왔었다. 죄인들이 모두 산에 갔다가 밤 10시가 돼서야 도착했는데 그의 어머니와 아내는 밤 11시까지 교화소 철문 앞에서 리 모 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 모 씨가 동사(凍死)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실신을 하고 말았다. 죽은 남편의 시신이라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아내의 요청에 면회 담당자는 “어디 와서 감히 죽은 죄인을 놓고 우는가? 당장 돌아가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실신해서 쓰러진 시어머니를 품에 안고 죽은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하는 여인의 모습은 면회 나갔다가 돌아온 죄인들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 직접 목격은 못했지만 그들의 심정이 얼마나 비참했을지 능히 짐작된다.

그 후로 허약병에 걸려 죽었거나 동사했던 죄인들의 부모형제들이 면회를 왔다가 교화소 철문 앞에서 울며 나가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몇십 번씩 교화소 철문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적시며 발걸음을 돌리던 그들을 보면서 죄인들은 모두 자기 일처럼 가슴 아파했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나 같은 죄인을 동정해달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교화소 죄인들 중에는 사기꾼, 살인자, 강간범, 강도, 좀도둑처럼 나쁜 사람들도 있지만 70% 이상은 교통사고를 비롯한 과실에 의해 죄를 짓게 된 사람들이다. 정말이지 죄를 짓자고 결심하고 죄를 짓는 사람은 불과 5%도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어찌하여 죽어서까지 가족을 만나지 못하고 고향으로 가지 못하는가?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서나 인민의 안전을 지키는 법이 존재했으며, 그 법을 지키는 사람들도 인민의 아들과 딸이고, 법적 제재를 받는 죄인도 역시 인민의 아들과 딸이었다.

죽어서라도 그리운 아버지, 어머니, 아내, 자식들, 형제들과 친구들 곁으로 가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며 죄인들의 한결같은 바람이었다. 죽을죄도 아닌 죄 때문에 교화소에 들어와서 허약병이나 노동재해로 죽어가는 것도 억울한 일인데 시신마저 불망산 화로에 태워져 두 번 죽음을 당해야 하는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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