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 발목잡은 쌀 차관

제21차 남북장관급회담이 회담 사흘째인 31일 북측의 쌀 차관 제공 요구에 막혀 속도를 내지 못하면서 회담의 성과마저 불투명한 상황에 처했다.

북측의 최대 관심사가 쌀 차관인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북측 권호웅 단장은 이날 오후 제2차 수석대표접촉에서 이재정 통일부 장관에게 쌀 차관 합의의 이행 지연에 문제를 제기했다. 1시간 동안의 접촉에서 상당 시간을 이 문제에 할애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측의 이런 태도는 쌀 얘기를 본격적으로 꺼내지 않았던 전날까지의 상황과는 달라진 모습이다. 북측이 쌀 차관 북송 지연을 문제삼으면서 회담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애초 우려가 들어맞은 셈이다.

◇ 5월 마지막 날이 D데이(?)= 권 단장은 첫 날인 29일 “모내기를 위해선 준비를 잘해야 한다”며 묘한 뉘앙스의 발언을 했지만 쌀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는 이어 30일 전체회의에서는 “현재 북남 사이에 합의된 문제들이 외세의 간섭으로 그 이행이 중단되고 있다”고 쌀 문제를 겨냥했다.

`외세’를 거론한 것은 2.13합의의 이행에 진전이 있기 전까지 쌀 차관을 보내기 힘들다는 우리 정부의 입장을 꼬집은 것이다.

권 단장은 조금씩 수위를 높였다. 그는 30일 오후 제1차 수석대표접촉에서는 “합의된 약속은 약속대로 지켜야 한다”고 `포문’을 열었고 같은 날 만찬에서는 “참관도 좋았고 식사까지 오늘까진 좋았는데..”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북측이 31일을 쌀 차관 북송 지연에 대한 공세를 취하는 D데이로 잡았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 날은 쌀 차관을 실은 선박을 북한에 보내기로 약속한 `5월 하순’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이다.

이날 판문점 채널을 통해 남북 간 쌀 차관제공 합의서 이행에 필수적인 `식량차관계약서’ 교환이 이뤄지면서 대북 식량차관 제공을 위한 행정작업이 마무리된 것도 눈길을 끈다.

지난 25일 우리측이 전달한 계약서 4부를 북측이 서명한 뒤 장관급회담 첫 날인 29일 다시 보내옴에 따라 우리 측이 30일 계약서에 서명을 마치고 북측이 보관할 2부를 이날 넘긴 것이다.

계약은 우리측이 서명해 계약이 완성된 30일에 발효됐다.

북측이 이런 흐름을 감안, 우리측을 압박할 수 있는 명분이 충분히 쌓였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 본의제 협상은 뒷전 = 이에 따라 이번 회담의 의제에 대한 협상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상황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미 주고 받았어야 할 공동보도문 초안도 아직 교환하지 못했다는 게 회담 관계자의 설명이다.

정부 당국자는 이에 대해 “쌀 차관은 이번 회담의 의제가 아니다”고 못박았다. 이 당국자는 그러나 회담 의제의 협상 상황에 대해서는 “원론적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내세운 평화정착이나 개성공단 통신.통행.통관 문제 개선방안, 열차 단계적 개통 등의 의제는 제대로 논의조차 안되는 상황인 셈이다.

더욱이 북측이 왜 합의해 놓고 이행하지 않느냐며 파고들어 우리 대표단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우리측이 늘 강조했던 것이 합의 이행이었기에 이번에는 같은 논리에 따른 북측의 역공에 직면한 것이다.

이재정 장관은 이날 북측의 촉구에 대해 우리측이 지난달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경협위)에서 식량차관제공합의서를 채택한 이후 쌀 차관과 관련한 우리측의 내부절차 경과를 설명하며 이해를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관계발전법 시행에 따라 쌀 차관 합의서를 법제처 심사, 국무회의 심의, 대통령 재가, 관보 게재 등의 절차를 밟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는 점을 알리고 쌀 차관 제공 의지에는 변함이 없음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고경빈 통일부 정책홍보본부장은 이날 수석대표접촉 내용과 관련, “쌀 차관 합의 이행이 늦어지고 있는 여러가지 정황에 대해 설명했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쌍방이 함께 방법을 찾자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우리측 설명에 대한 북측 반응은 싸늘했던 것으로 관측됐다.

◇ 협상 난항 속 정부 방침 변할까 = 이런 상황에 비춰 쌀 차관은 이번 회담을 푸는 열쇠가 될 전망이다.

북측이 처음엔 쌀 차관 북송지연에 대한 불만을 간접적으로 표출하다가 이날 노골화한 점에 비춰 단순히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카드로 간주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협상과정에서 신축성을 발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회담 마지막 날인 6월1일까지 쌀 차관합의 이행을 촉구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 때문에 회담장 안팎에서는 쌀 차관 북송 시기에 대한 정부의 입장이 바뀔지 여부가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정부의 스탠스는 지난달 경협위에서 쌀 차관합의서를 채택하면서 “북한의 2.13합의 이행 여부에 따라 제공 시기와 속도를 조정할 수 있다”고 북측에 일방 통보한 것이 유지되고 있다.

이 경우 2.13합의 이행을 막고 있는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정부가 쌀 북송을 시작하기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와 관련, “현재 정부 입장에 변화가 없다”고 말했지만 향후 변화 가능성에 대해서는 답변을 피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애초 정부가 국민에게 공표한 약속을 깨고 2.13합의 이행이 없는 상황에서 쌀을 북송할 경우 국내 여론이 악화될 수 있고 남북관계와 6자회담의 속도조율을 주장해온 미국과의 관계도 불편해질 가능성이 있어 정부가 쉽게 입장을 바꾸기는 힘들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다만 주목할 만한 부분은 우리측이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쌍방이 함께 방법을 찾자고 제안한 대목이다.

회담 관계자들은 이 방법의 내용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일각에서는 적어도 북송 시기를 구체화한 확약이 없는 한 북측이 수긍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아울러 첫 항차가 늦어지기는 했지만 향후 북송이 가능한 상황이 오면 수송기간을 최대한 단축하는 방안이 제시될 가능성도 엿보인다.

또 지난해 북한 수해복구를 위해 지원하다가 핵실험으로 북송이 중단된 쌀의 잔여 물량을 `임시변통’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거론될 수도 있다.

정부는 대북 수해복구용 쌀 10만t 가운데 잔여분 1만500t을 4~5월에 모두 보내겠다고 지난 3월 발표했지만 아직까지 하나도 보내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우리측이 제시한 여러 방안을 북측이 수용하지 않을 경우 이번 회담은 공동보도문조차 내기 어려울 것이라는 게 회담장 안팎의 관측이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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