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남북 출입사무소를 나서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다섯 차례나 일정을 연기해 결국 김정일의 ‘선물 보따리’를 안고 귀환한 그에게선 ‘당당함’마저 엿보였다.
관광객 피살사건 이후 중단된 금강산·개성관광 재개를 위한 김정일의 메시지를 받아온 만큼 ‘정부도 못하는 일을 자신이 했다’는 자신감을 한껏 연출하는 모양새였다.
그의 첫 일성(一聲)은 김정일과 면담 당시 합의를 이끈 상황 설명이었다. “김정일 위원장님께서 원하는 것 얘기하라 해서 다 얘기했다. 이야기를 하니까 다 받아주셨다”라고 말했다. 관광재개 하자고 하니까 김정일이 ‘그러자’고 화답했다는 전언인 셈이다.
일정이 수차례 연기된 이유에 대해선 “원래 김정일 위원장이 일정이 쌓여 있어서 주말에 오라고 했는데, 좀 일찍 갔다. 그래서 일정이 좀 늦어졌다”고 답했다. 2박3일에서 7박8일로 체류 일정이 ‘널뛰기’한 이유다.
현 회장은 “김정일 위원장님과 면담 후 공동 합의문을 작성했다”고 전했다. 금강산·개성·백두산 관광, 개성공단 관련 육로통행 제한 철회, 이산가족 상봉 등 합의는 자신과 김정일의 ‘독대’로 길을 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곱씹어보면 김정일과의 면담은 당초 주말로 예정됐는데, 일찍 방북 길에 올랐다는 말이다. 사전 협의를 위해서든 다른 이유에서건 현 회장의 ‘체류연장’은 극적인 효과를 낳았다.
현 회장으로선 금강산 관광을 재개하기 위해 정부를 설득할 수 있는 명분과 국민의 악화된 대북인식을 전환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합의문을 통해 정부에 ‘공’은 넘겼으니 국민의 이목만 집중시켜 ‘극적효과’를 통해 대북인식만 전환되면 관광재개가 가능하다는 판단도 엿보인다.
현 회장은 “백화원 영빈관을 숙소로 제공받는 등 북측의 각별한 성의로 환대를 받았다”고도 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 대남 대결공세를 이어가고 있는 북한이 민간인인 자신에게는 극진하더란 설명이다.
그는 금강산 관광과 관련, 김정일이 “긍정적으로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피격사건에 대해서는 “앞으로 절대 그런 일 없을 것”이라는 언급도 있었다고 밝혔다.
김정일의 지시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수령의 무오류성’을 최고의 신념으로 강조하고 있는 북한이 박왕자씨 피살사건의 사과와 진상규명 등을 전제한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동안 ‘달러박스’ 역할을 톡톡히 한 현대그룹 수장의 ‘읍소’에 대한 ‘수사’적 화답일 가능성이 크다.
현대그룹과 북한의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가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에 관한 합의를 담은 공동보도문을 발표한 것은 이번이 3번째다. 그동안 공동보도문은 사업이 위기에 봉착했다가 재개될 때 총수가 방북해 협상을 벌인 뒤 합의사항을 내놓을 경우 사용됐다.
현 회장의 방북은 수많은 직원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기업의 총수로써 기업회생을 위해 김정일에게 ‘읍소’해 돌파구를 마련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일 수 있다. 기업의 활로를 모색해야 하는 최고경영자로서의 고충 역시 십분 이해된다.
하지만 금강산 관광 재개는 이미 사업자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한 관광객의 ‘죽음’과 앞으로 닥칠 수도 있는 우리 국민의 ‘생명’이 담보된 문제다. 단순히 기업의 이익만을 위해 ‘흥정하듯’ 섣불리 재개를 결정할 수 없는 문제인 셈이다.
가깝게는 북한군의 총탄에 유명을 달리한 고(故)박왕자씨 피살사건의 진상규명과 직결되고 나아가 향후 관광객들의 ‘신변안전’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현 회장이 관광재개를 위한 명분을 위해 ‘분위기 몰이식’으로 합의서를 작성한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다.
아직도 금강산 관광에 들뜬 어머니와 아내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 박 씨 가족에게 현 회장은 어떤 위로의 말을 할 것인가. 북측의 사과와 진상규명 약속이 생략된 합의였다면 먼저 박 씨 가족들을 찾아가 머리 조아려 사과해야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