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은 회장, 이번에도 당하면 안됩니다”

“박정희 평가는 후세들이 해야지 동참자들이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때 그 환경에서는 유신이고 뭐고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위 민주화도 무정부적 민주화가 돼서는 곤란합니다.”

이 말을 누가했을까? 남한의 어느 보수 논객이? 아니다. 바로 김정일이 한 말이다. 2000년 8월 남한 언론사 사장단과 만난 자리에서 김정일은 박정희에 대해 평가해 달라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김정일이 박정희를 높게 평가하고 한때 박정희式 경제발전 모델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2002년 5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당시 한국미래연합 창당위원장)와 만났을 때도 박정희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박정희를 지독히도 싫어하는 남한의 현 집권세력들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김정일

사람의 ‘말’에는 인격과 사고방식이 드러난다. 그래서 김정일은 언론에 장시간 노출되는 것을 꺼린다. 김정일과의 장시간의 대화가 있는 그대로 전해진 것은 위에서 소개한 언론사 사장들과의 면담 자리가 유일하다.

당시 김정일은 “통일시기는 언제쯤 될까요?”라는 질문에 “그건 내가 맘먹을 탓입니다”라고 말했다. TV는 주로 KBS를 본다고 했고, NHK는 광고가 없어서 좋은데 중국 CCTV와 러시아TV는 관영인지 아닌지 혼란스럽다고 했다. 또한 “영국 말은 발목이 약해 내가 타면 다리가 부러질 것”이며 “러시아 올리브 종자가 좋다”고 말(馬)에 대한 평을 했고, 포도주는 역시 프랑스산이 좋다고 칭찬했으며, 당나귀 고기가 맛이 좋다고도 했다.

2002년 4월 1일 임동원 씨가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김정일을 만났을 때는 당시 남한에서 한창 인기있던 사극(史劇) ‘여인천하’를 즐겁게 보고 있다고 했고, ‘명성황후’와 ‘용의 눈물’, 영화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도 봤다고 자랑했다. 이번에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만났을 때는 ‘불멸의 이순신’을 즐겨본다고 말했다.

2001년 8월, 20여일동안 러시아를 방문한 김정일과 동행했던 콘스탄틴 풀리코프스키 극동 연방지구 러시아 대통령 전권 대사는 김정일이 전용열차 안에서 인터넷을 즐기고 세계 각국의 위성TV를 시청하고 있었으며, 노래방 기기로 러시아 민요를 흥겹게 불렀다고 전했다.

이런 이야기를 김정일은 자신의 개방성과 세계적인(?) 안목을 자랑하기 위해 대외에 공개하나 본데, 그럴 때마다 기자는 북한 일반 주민들이 떠오른다.

북한 주민 가운데 세계 각국의 TV를 마음대로 보고, 명마(名馬)와 명주(銘酒)를 평하고, 남한 TV 드라마를 재밌게 보고 있다고 외부 방문자에게 자신에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외부 라디오를 들었다는 이유로, 술자리에서 남한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굶주림에 못 견뎌 소를 훔쳐먹었다는 이유로 수용소에 끌려가거나 공개처형 당하는 나라에서 말이다.

주민들은 굶주려 나무껍질을 벗겨 먹고, 3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것을 세상이 알고 있는데 포도주와 당나귀 고기를 자랑스레 이야기하는 사람이 바로 김정일이다. 그래서 2002년 8월 프랑스 좌파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김정일의 이런 발언을 전하면서 “북한의 지휘자가 입심을 늘어놓다”라고 꼬집었던 것이다.

다음 번엔 또 누가 당할까?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이 김정일을 3시간 30분 동안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김정일이 이런 말을 했다고 현회장과 배석했던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이 전했다.

“몽헌 회장에게는 금강산을 줬는데 현 회장에게는 뭘 줄까 생각하다 백두산을 준다.”

금강산, 백두산이 김정일 사유물인가? 자기 맘 내키는대로 금강산은 누구에게, 백두산은 누구에게 나눠줄 수 있는 것인가? 아무리 자신이 통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인 수사라고 해도, 이 말에서 김정일의 사고방식이 묻어난다.

김정일은 2000년 8월 언론사 사장들과의 만남에서 경의선 철도 연결문제를 이야기하면서 “몽헌이한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또 입이 찢어지더라고요”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도 그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사람을 다루는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실제 김정일에게 故 정몽헌 회장은 한참 ‘애송이’로 보였을지 모른다. 자신의 손바닥에서 갖고 놀 수 있을만한 인물이라 생각했을 것이고, 그가 무엇을 바라는지를 분명히 간파하고 있었다. 지난 6월 정동영 통일부장관도 똑 같은 방식으로 김정일에게 ‘요리 당했을’ 것이다.

여하튼 정몽헌 회장은 김정일에게 한껏 이용당하다 불행한 최후를 맡았다. 김정일도 마음 한편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지 6.15남북공동선언 5주년 행사에 현회장이 방북했을 때는 만나주지 않다가 이번에 백두산이라는 ‘선물’을 안겨줬다.

통일도 자기 맘 먹을 탓이라고 생각하는 김정일인데 무엇인들 우습게 보이지 않겠는가. ‘천상천하 유아독존’ 식으로 떼어주고 한동안 이용해 먹다가 가치가 떨어지면 또한 가차없이 차버리는 것이 김정일이다. 남편을 죽음으로 내몰고 이제는 그 아내까지 등쳐 먹으려 하고 있다. 그 효용가치가 떨어지면 또 누구에게 무엇을 선물하면서 빨아먹을지, 안타깝고 씁쓸하기만 하다.

다음 번엔 묘향산일까, 신의주일까, 원산항일까?

곽대중 기자 big@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