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수도 평양에 장애인 거주 할 수 없다”

▲ 황해북도 송림의 의족공장 <사진:ICRC>

20일은 국내에 입국해서 두 번째 맞는 ‘장애인의 날’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장애인에 대한 처우개선과 각종 사회 우대정책이 선진국을 가름하는 징표로 간주되는 것 같다. 국내에서 대학 진학이나 취업 면접 때 사회봉사활동을 평가항목으로 넣는다는 말을 듣고 놀라기도 했다. 북한에서는 장애인 우대정책이나 봉사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도가 도입되는 것은 소외계층에 대한 복지정책과 시민들의 의식수준이 발전했다는 말이다. 북한은 인민의 낙원이라고 떠들지만 보통 주민들도 굶어 죽은 판에 장애인들은 더할 나위 없이 비참한 생을 살고 있다.

군대에서 부상을 입은 영예군인은 국가에서 대우하지만 나머지 장애인들은 말 그대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로 치부된다.

평생 소외계층으로 살면서 자기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기가 힘들다. 여기서는 일반인들이 장애인을 차별한다고 하지만 각종 우대 시설이나 혜택, 취업 기회 등을 볼 때 북한에 비하면 수준 높은 제도를 가지고 있다.

북한의 대표적인 장애인 정책이 바로 평양 시내에서 장애인을 쫓아내는 것이었다. 아직도 평양시 중구역, 평천구역, 대동강구역 등 중심구역에는 장애인들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장애인들이 ‘혁명의 수도’ 평양에 있는 것이 외국인들에게 불쾌한 인상을 준다는 이유에서다. 이러한 정책은 김정일이 직접 지시한 것이다. 이 정책은 북한의 장애인에 대한 시각을 그대로 드러낸다.

평양 외곽으로 가면 그래도 장애인이 있다. 이들은 평양 외곽이라는 특징 때문에 가족의 보호 아래 외출을 자제하면서 몰래 살고 있다.

불행을 불러온 ‘당의 지시문’

필자가 평양시 평천구역에 살던 때 일이다. 필자의 누이동생은 어릴 때 소아마비에 걸려 한쪽 발을 절었다. 워낙 한쪽 다리가 가늘고 짧기 때문에 걷는 모양새가 보기 좋지 않았다.

1982년 7월 어느 날, 농업위원회에 근무하시던 아버지가 어두운 안색을 하고 집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저녁밥을 드시다 말고 윗방에 올라갔고, 어머니는 ‘분명 직장에 무슨 일이 생겼다’고 생각하고 아버지를 쫓아 올라갔다.

한참 만에 아랫방에 내려온 아버지와 어머니는 11살 나던 여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무래도 네가 큰아버지 집에 좀 가 있어야겠다”고 말씀했다.

철이 없어 처음에 놀러 가는 줄 알고 기뻐했던 동생은 “싫어. 난 엄마와 같이 있을래. 나 안 갈래”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병신이라며 남들은 손가락질 했지만 우리 부모님은 다른 형제보다 여동생을 더욱 예뻐하셨다. 우리 형제들도 그런 부모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어릴 때 소아마비로 죽을 뻔 했던 애를 겨우 살려 놓았는데, 또 지방으로 보내야 하는 부모님 가슴은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아무리 친척이지만 장애인 조카를 반가워 할 리 만무했다. 동생도 부모의 슬하를 벗어나 지방에 내려가 산다는 것 자체가 막막했을 것이다.

동생을 보내게 된 사연은 이러했다. 그날 아침 직장 당비서가 아버지를 불렀다고 한다. 당비서는 “00동무, 동무네 집에 딸이 장애인이지, 당에서 방침이 내려왔는데, 그 애를 지방에 보내든가, 아니면 동무 집안이 지방에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딸애를 문전출입 일체 시키지 않고 키우겠다”고 사정했지만, “혁명의 수도 평양에는 장애인이 있으면 안 되다는 것이 당 방침이라 나도 어쩔 수 없다”는 말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남한은 지방사람도 본인의 의사에 따라 서울로 상경해 살 수 있지만, 평양은 그렇지 않다. 신분이 좋아야 살 수 있다. 부모가 과오를 범하거나, 자식들이 가정교육이 덜돼 사고를 쳐도 지방으로 쫓겨나야 한다. 장애인을 지방에 내보내라는 것은 엄연히 당정책이다. 이를 거역할 경우, ‘당정책 태공분자’로 가족 전체가 쫓겨나야 한다.

평양은 그나마 공급(배급)이 좀 되기 때문에 북한사람들에게 있어서 희망의 땅이다. 지방 사람이 “평양에 올라간다”고 하면 큰 출세를 한 것으로 여긴다. 아버지도 군복무 10년을 마치고, 농업대학을 졸업하고 어렵사리 국가기관에 들어갔는데, 사실 딸 때문에 자리를 내놓고 지방으로 내려가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아버지는 평양에서 수 백리 떨어진 지방에 사는 큰 아버지에게 “다른 조치가 있을 때까지 애를 좀 맡아 주세요”라고 부탁했다. 큰 아버지도 평양에 사는 동생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던 터라 흔쾌히 승낙했다.

“너 왜 쫓겨왔어” 집단 따돌림에 몰려

목발을 짚고 길을 떠나는 동생을 보던 어머니가 끝내 눈물을 쏟으셨다. 어머니가 땅에 주저 앉아 고개를 땅에 떨구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필자도 동생의 손을 잡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꼭 데리러 간다는 약속도 했다.

동생은 다리가 불편했지만 얼굴이 예쁘고 공부도 잘했다. 그래서 집안에서는 이쁨을 받았지만 지방은 대우가 달랐다. 걸음걸이가 이상해 학생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동네 애들한테서 놀림을 당했다고 한다.

또 평양에서 쫓겨 내려온 사람들을 좋지 않게 대하는 풍조가 있다. 그들은 “너 왜 쫓겨왔어? 너의 아버지 떨어졌어?”라고 놀려댔다고 한다. 이에 화가 난 동생이 돌을 던져 한 애를 맞히는 바람에 큰 어머니가 안전부에 불려 다니고 난리 났다고 한다.

동생은 주위 놀림이 하도 심해 문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학교에도 다니지 않았는데 학교에서도 차라리 잘됐다는 투였다고 한다. 3년 동안 지방에 적응을 못한 동생은 방학 때 평양에 올라와 큰아버지 댁으로 내려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낙랑구역에 있는 외할머니와 상의하여 그쪽 당간부에게 큰 뇌물을 주고 그곳에 머물도록 했다. 그때부터 동생은 바깥출입을 금하고, 집에서 봉제일을 배워 할머니와 생계를 이어갔다. 중학교를 졸업 못한 동생이 장애인 학교에 갈 수 없었다.

평성에 장애인들을 일부 수용하는 상업간부학교 ‘재단사반’ 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집을 떠날 수 없어 동생은 여러 재단사들을 찾아 다니며 어깨너머로 봉제 일을 배웠다.

동생은 그때 배우지 못한 자신에게 두고두고 후회를 했다. 필자도 어떤 차별이 있더라도 참고 이겨내는 것만이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그런 차별 속에 학교를 그만둔 동생 탓만 할 것도 아니었다.

남한의 장애인들을 볼 때마다 지금도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고 있을 동생 생각이 간절하다.

문정철(가명)/(평양 출신. 2005년 입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