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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최근 미국과의 관계정상화 과정에서 연락사무소 개설을 놓고 입장이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명길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공사는 6자회담 실무그룹 회의 참석을 위해 베이징으로 떠나기 전 이창주 국제한민족재단 상임의장과 가진 통화에서 미국과 수교 전 연락사무소 개설을 희망한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는 6일(현지시각) 종료된 뉴욕회담 직후 “연락사무소는 중국과 했던 모델이고 미중 관계에서 볼 때 매우 훌륭한 모델이었다”며 “내 생각에는 북한과는 그런 점이 공유되지 않았다. 북한은 외교관계로 (바로) 가자고 한다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이 의장은 김 공사가 자신과의 전화 통화에서 “북미간의 수교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미국의 법적 절차가 복잡하기 때문에 1단계 외교적 진전을 원한다”고 말한 것을 자신이 연락사무소 개소로 해석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 공사가 말한 ‘1단계 외교적 진전’이 ‘연락사무소’ 개설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는 미국과 수교까지 가는 과정에서 현실적으로 다양한 걸림돌이 많은 만큼, 연락사무소라는 중간단계를 거침으로써 미북 관계정상화에 대한 의지를 정치적으로 과시하겠다는 판단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美, ‘제네바합의’ 따라 연락사무소 개설에 적극적
연락사무소는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못한 두 나라가 대사·영사 기능이 필요할 때 임시로 설치하는 것이다. 지난 1973년 미국과 중국이 국교를 수립하기 전 외교관계를 시작하면서 설치한 바 있다.
미북 연락사무소 설치는 1994년 8월 3단계 미북 고위급 핵회담 합의 발표문에서 양측이 관계정상화를 위한 조치로서 수도(首都)에 외교창구를 개설키로 합의하면서 수면위로 부상했다.
같은해 10월 제네바합의에서 전문가회의를 통해 기술적인 문제를 검토하고 연락사무소를 개설을 합의했다. 합의사항에는 사안의 진전에 따라 연락사무소를 대사급 쌍무 관계로 격상한다는 원칙도 도출했다.
미북은 1994년 12월 워싱턴에 연락사무소 개설에 관한 제1차 전문가회담을 열었다. 이어 미국은 1995년 1월 린 터크(Lynn Turk) 국무부 북한 담당관을 단장으로 한 대표단을 평양에 파견해 연락사무소 부지를 물색했다.
같은 해 4월 북한도 유엔 주재 대표부 직원들이 워싱턴을 방문해 연락사무소 부지를 물색했으나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다. 양측은 ‘상호 임시 영사보호권’에 합의하고 북한은 뉴욕주재 유엔 대표부가, 미국은 북한주재 스웨덴 대사관이 각각 이를 대행하기로 했다.
또한 미 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해 평양주재 구(舊)동독 대사관 건물을 연락사무소로 활용하기 위한 건물보수 문제 등을 북한과 협의했다.
이와 함께, 미국은 1996년 8월 스펜스 리처드슨(Spence Richardson)을 주(駐)평양 미 연락사무소장으로 내정했다.
그러나 북측이 미국 외교 행랑(파우치)의 판문점 통과와 미 외교관의 남북 왕래 허용 및 통신문제 등 기술적인 사항에서 체제보안 문제 등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1996년 6월 이후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졌다.
특히 양측은 외교 행랑 및 평양주재 외교관의 판문점 통과에 따른 보안문제와 워싱턴 주재 북측 연락사무소 건물에 대한 미측의 재정지원 문제 등에서 입장 차이를 노출했다. 여기에 96년 9월의 북한 잠수함 동해안 침투사건 등도 협상 진전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협상 부진 속에서 양측은 1997년 12월 연락사무소 개설 사전 준비를 위한 임시요원 상호교환 방식에 합의하기도 했으나, 1998년 8월 북한이 ‘대포동 1호’ 미사일을 발사함으로써 논의 자체가 중단됐다.
北, ‘연락사무소’와 ‘반미’의 상충 어떻게 풀지 고민
미국이 이처럼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연락사무소 개설을 통해 북한 핵·미사일 개발·테러리즘·실종 미군 유해 공동발굴 등 미북 간 주요 현안에 대한 미측 입장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창구의 확보를 원했기 때문이다.
또 장기적으로 북한의 제네바합의 이행을 점검할 수 있는 장치가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연락사무소 개설에 적극 임했다.
반면, 북한은 표면적으론 재정 문제 등의 이유를 들어 워싱턴 연락사무소 부지 물색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또 주유엔 북한 대표부가 미북 실무접촉 등을 통해 사실상의 대미 연락사무소 역할을 수행하는 만큼, 별도의 연락사무소 개설을 통한 실익이 미약하다고 판단했다.
특히, ‘혁명의 수도’ 평양에 미 연락사무소 개설시 미 외교관의 첨단 정보통신 장치 등을 이용한 미측의 광범한 대북 정보수집을 우려했다.
그러나 북한 당국은 수도 평양에 성조기가 펄럭일 경우 ‘반미’를 근간으로 삼아온 통치체제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소극적으로 임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을 ‘철천지 원수’로 인식해온 북한 주민들에게 미칠 충격도 적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북한이 뉴욕회담 당시와 달리 ‘연락사무소 설치 희망’ 의사를 들고 나온 것은 미북 관계정상화 논의를 위한 모멘텀을 유지하기 위한 전술적 고려일 뿐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즉, 연락사무소 개설을 바라지는 않지만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채널을 열어두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연락사무소가 개설된다고 하더라도 외교수립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린다는 것이 대체적인 전망이다. 미국은 현재까지 북한과의 관계정상화를 위해서는 ‘비핵화’가 우선돼야 한다고 말한다. 미국은 중국과의 수교도 1973년 연락사무소 개설 이후 6년만인 1979년 1월에야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