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이슈 실종’ 北 유.불리는

북한이 핵시설 불능화 조치를 중단하고 복구 준비를 하고 있음에도 그로 인해 고조될 수 있는 미국의 고강도 대북 압박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이상설을 계기로 자연스럽게 면하는 효과를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북한이 상정한 시나리오, 또는 북한이 원하는 결과인지에 대해선 분석이 엇갈린다.

북한이 미국의 정권교체기를 감안, 차기 행정부와 협상을 염두에 두고 핵협상을 현 수준에서 동결키로 마음먹었다면 그에 부합하는 결과이지만, 벼랑끝 전술을 통해 최소한 테러지원국 해제를 미국의 부시 행정부 임기내에 얻어내려 했다면 건강이상설이 핵문제를 집어삼키는 현 상황은 북한이 원하는 게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9.9절 기념 열병식에 김정일 위원장이 불참함으로써 건강이상설이 본격 대두되는 것을 전후해 미국은 북한의 불능화 중단과 핵시설 복구작업에 비교적 절제된 반응을 보였다.

미국측은 특히 북한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핵협상 교착 국면에 대해 “시간이 가고 계속 노력하면 우리는 이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한 것에 “우리는 이 발언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계속 협력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호응하기도 했다.

또 미국이 북한에 1년간 지원키로 한 식량 50만t가운데 4차 지원분인 옥수수 2만4천500t이 이달초 북한에 도착하는 등 식량지원도 핵문제와는 별개로 계속되고 있고, 한국 등의 에너지.식량지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16일 “미국은 현재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6자회담의 모멘텀을 유지하면서 10.3합의를 지켜나가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 같다”며 “이러한 상황에서 김 위원장의 와병에 대해 말을 아끼면서 자극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베이징 올림픽 이후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됐던 북미간 검증문제 대립에 대한 중국측의 중재 노력도 가시화되지 못하고 있다.

중국측은 북한이 영변 핵시설의 불능화 조치를 중단하고 복구 움직임을 보이는 데에 우려스런 시선을 보내면서도 종래와 달리 특사 파견 등 공식적인 중재 움직임을 자제하고 있는 것은 김정일 위원장이 와병상태여서 특사를 파견해도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특히 김 위원장의 와병설이 불거진 뒤에도 중국측은 “중국과 북한은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북한측으로부터 김 위원장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며 북한 정세에 관한 언급을 극도로 아끼고 있다.

개리 새모어 미국 외교협회 부회장은 “미국 대선이 두달 앞으로 다가온 만큼 북한은 대선 결과를 지켜본 뒤 기존의 핵협상 입장을 재검토할 가능성도 있다”며 미국 대선을 앞두고 별다른 협상 진전이 없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북한의 의도가 미국 대선까지 ‘그럭저럭 상황을 관리하는’ 것이라면 현재 미국의 대북 압박지수가 높아지지 않고 있는 것은 북한이 성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종래 북한이 미국과 협상이 진전되지 않을 때마다 원자로 재가동, 핵연료봉 재처리, 미사일 발사, 핵실험 등 강경한 행동을 통해 압박함으로써 상대의 양보를 취하는 ‘벼랑끝 전술’을 취해 온 사실에 비춰 현재 미국의 태도는 북한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 대북 전문가는 “북한은 불능화 중단과 핵시설 복구 움직임을 국제 이슈화함으로써 미국이 더욱 적극적인 협상 자세로 나오도록 이끌어내기를 원했을 수 있는데 미국은 별다른 입장 변화가 눈에 띄지 않는다”며 “오히려 김 위원장의 건강이상설이 국제사회의 주목을 끌면서 핵문제는 부차적인 문제로 밀리는 양상”이라고 지적했다.

불능화 중단과 핵시설 복구라는 강수로 미국을 압박, 테러지원국 지정의 해제를 받아내려 했던 북한의 의도가 물거품이 된 상황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핵문제의 ‘실종’이라는 현 상황이 북한의 의도와 부합하는지 여부는 불능화 조치의 중단과 복구 움직임이 누구의 결정인가와도 연결돼 있다.

일각에선 김정일 위원장이 지난달 중순께 쓰러진 것으로 알려진 점 때문에 김 위원장의 공백기에 군부 강경세력이 협상 무산을 노려 강경한 정책결정을 했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는 “북한 내에서는 김 위원장의 와병을 틈타 이미 권력투쟁이 전개되고 있으며 군부가 북핵 불능화 중단 등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하려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북한이 불능화 조치의 중단 결정을 미국을 비롯한 6자회담 참여국에 통보한 지난 14일까지는 김정일 위원장이 ‘건재’했다는 것이 통설이어서 그 이후의 구체적인 움직임도 이미 김 위원장이 결정해놓은 것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특히 북한의 강경한 입장이 북미간 협상과 병행해 나왔다는 점도 김 위원장의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분석이다.

조성렬 연구위원은 “북한도 경제적 지원과 테러지원국 해제를 명문화한 10.3합의를 깨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며 “김 위원장이 와병중이라고 해서 강경일변도의 정책을 펼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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