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실험 ‘강경행보’

핵실험을 정점으로 한 북한의 잇단 강경 행보는 2006년 국제 사회를 뜨겁게 달군 최대 이슈 중 하나였다.

북한의 핵실험으로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안보 지형의 근본적 변화가 초래됐고, 국제 비확산 체제도 크게 흔들렸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벼랑끝 외교’를 되풀이했다.

“미국의 고립 압살 책동이 최악의 상황을 몰고 왔다.”

북한은 10월3일 이런 주장 속에 핵실험 실시 방침을 전격 공표했다. 그리고 불과 엿새 뒤인 9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지하 핵실험을 강행함으로써 한반도를 일대 소용돌이 속으로 빠트렸다.

8년 만의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 재개 이후 3개월만의 일이자 한반도 비핵화 돌파구를 열었다고 우리 스스로 자평했던 북핵 6자회담에서의 9.19 공동성명이 채택된 지 불과 1년만이었다.

잘 짜여진 시나리오 같이 숨돌릴 틈 없이 진행된 평양발 핵폭풍은 역설적으로 9.19 공동성명 직후부터 시작됐다.

미국이 마약, 위조지폐 등 불법행위 단속을 명분으로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 계좌 동결에 나선 것이 정면 충돌의 출발점이었다.

북한은 BDA 계좌 동결을 “미국의 반공화국 금융제재는 핏줄을 막아 우리를 질식시키려는 제도말살 행위”라고 강하게 반발했지만 미국은 “불법활동에 대한 정당한 법집행”이라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그러자 북한은 “마카오 동결자금 해제는 대화재개의 최소한의 조건”이라며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은 채 상반기 내내 대치 국면을 지속했고, 대응 조치도 거듭 경고했다.

미국도 놀랄 정도로 북한의 반발은 거셌다. 그 만큼 북한으로서는 아픈 조치였다는 분석이 나왔다. 2천400만달러에 불과한 BDA 계좌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비자금을 비롯해 BDA를 통해 거래되던 주요 통치자금줄이 막혀버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북한은 3월 뉴욕에서 미국과 비공식 접촉을 갖고 돌파구 마련을 시도했지만 위폐문제 해결을 위한 정보 교류와 합동 협의기구 설치를 골자로 하는 북한의 제안은 미국이 “불법 행위는 협상 대상이 아니다”며 거절하는 것으로 일축됐다.

6월에는 북한이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의 평양 방문을 공개적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역시 “북한과의 어떠한 협상도 양자 협상이 아닌 6자회담을 통해서 한다”는 백악관의 거부로 무산됐다.

결국 북한은 미국의 대북적대 정책을 명분으로 실력 행사에 들어갔다. 이에 때맞춰 북한 내 협상파보다 군부 강경 세력이 득세하기 시작했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미국의 독립 기념일 맞아 7월 5일 장거리 미사일 ‘대포동 2호’를 포함한 6발의 중.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를 강행했다. 미국 본토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됐던 대포동 2호는 40초만에 부러져 발사대에서 2km 이내의 해안가에 추락하는 실패로 끝났지만 국제사회의 우려는 적지 않았다.

북한은 자신들의 행위를 ‘자위적 군사훈련’이라고 했다. “압력을 가하려 한다면 보다 강경한 물리적 행동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경고도 내놓았다.

그러나 미국도 꿈쩍 하지 않았다. 대신 미사일 프로그램 관련 행동 중지, 조건 없는 6자회담 복귀, 핵 프로그램 포기 등을 골자로 한 유엔 안보리 결의 1695호의 만장일치 통과로 응수했다.

북한 역시 멈추지 않았다. 미사일 발사 3개월 뒤인 10월 모든 주변국의 만류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핵실험 카드(10.9)를 강행했다. 대외적 강경 행보 속에 내부적으로는 연일 ‘자력갱생’과 ‘수령결사옹위’를 강조하며 핵실험 이후 체제 단속도 강화했다.

실험 이틀 뒤인 11일 북한은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미국의 핵위협과 제재압력 책동 때문”에 핵실험을 했다고 역비난 공세에 나섰다. 또 “미국의 압력 가중시 선전포고로 간주하고 계속 물리적 대응을 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제2, 제3의 핵실험 관측도 나오며 긴장은 한층 높아져 갔다.

큰 충격을 받은 국제사회는 유엔 안보리 헌장 7조에 의거한 대북 제재결의안을 통과(10.15)시키며 맞대응에 나섰다. 중국과 러시아도 적극 동참했다. 북한의 잇단 모험으로 혈맹이었던 북중 관계도 최악의 상태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극적으로 일단 대화 국면은 마련됐다. 중국의 중재로 10월말 북-미-중 3자가 베이징(北京)에서 만나 6자회담 재개에 전격 합의했다.

북미 양측은 11월말 다시 베이징에서 만났고, 이 자리에서 영변 핵시설 가동중지,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수용 등을 포함한 선행 조치와 이에 따른 상응 조치를 담은 미국의 새 제안을 받은 북한의 응답으로 핵실험 실시 2개월여가 지난 12월18일부터 중단 13개월만에 6자회담은 가까스로 재개되게 됐다.

그러나 회담 전망이 밝은 것은 아니다. 북한이 최소한의 양보는 준비했겠지만 이를 위해 요구하는 상응 조치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높다.

북미 양측의 대결 속에 2006년 연말은 또 한 번의 고비로 다가오고 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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