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과 미사일을 끌어안은 북한 어디로 가고 있나?

역사는 반복되는가. 불과 2개월 전, 전쟁이 곧 일어날 것 같던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은 가라앉고 협상으로 나아가는 다양한 접촉이 시작됐다. ‘격’을 이유로 남북회담이 무산된 건 결정적 장애라기 보단 과정상의 해프닝으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 더불어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 방중을 계기로 6자 회담에 참여했던 국가들 간의 다양한 양자접촉이 가시화됐다. 심지어 일본은 단독으로 평양에까지 다녀왔다. 기습적인 단독 드리블이다. 최종적으로 누가 골대에 공을 넣을까?


과연 한반도 비핵화는 가능하기나 한가. ‘조선반도의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던 수사와 달리 김정일은 ‘핵개발과 인공위성 발사는 자신의 유훈’이라고 남기고 죽었다. 작년 12월에 있었던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대한 안보리의 추가 대북 결의안(1월 23일)이 나오자마자 북한 외무성은 비핵화 포기 선언을 내놓았다. 심지어 더해서 정전협정 무효화 카드까지 꺼냈다.


그 후 3차 핵 실험과 단거리 미사일 발사, 말로 할 수 있는 모든 위협의 말폭탄에 대한 미국의 억지력 과시 등 동원 가능한 군사적 시위는 최고조에 달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주요 회담국이 물밑 접선을 통해 다시금 협상테이블로 마주할 것을 가늠하는데 정작 북한이 낚시대를 드리우는 모양새다. 북한과 주요 나라들은 다시 협상에 임할까? 이는 북핵 안정화에 얼마나 기여할까?


이런 추이는 25년 전 1차 핵 위기의 상황을 재연하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는 반복되며 시간을 연장하고 있는 것일까? 1989년 프랑스 상업위성이 포착한 사진 몇 장으로 불거진 북핵 의혹이 극심한 전쟁위협을 거쳐 1994년 일단락(제네바 협의)된 데에는 당시 클린턴 정부(민주당)의 역할이 컸다. 협상을 통한 보상으로 핵 개발 시도 껴안기였다.


2002년 농축우라늄 문제가 불거진 2차 핵 위기는 다자회담(6자 회담)으로 포섭되는가 싶더니 금강산 민간인 피살사건, 천안함, 연평도 도발로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작년 12월 세 번째 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금년 2월 3차 핵실험으로 촉발된 3차 핵 위기로 북한은 되돌아 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6자 회담 무용론이란 자괴감을 무릅쓰고 미국이 마지막으로 기댔던 2·29합의(2012년)마저 무참히 깨진 지금 북한의 대화제의에 미국이 행동으로 진정성을 보이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핵 포기를 위해서는 최소한 그 체제가 안고 있는 핵 수요(안보상 이유, 사회적 지위, 경제적 필요)를 대체해줘야 이론적으로 타협가능(feasible)하다는 것이 비확산론의 내용이다. 그러나 핵 수요가 대체 충족된다 해도 지도자의 의지와 결단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 비핵화 이슈이기도 하다.


북한이 공식적으로 주장하는 핵 보유의 필요성은 미국의 위협에 대한 방어차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협상 테이블에서는 경제적 대가가 빠질 수 없다. 중유 100만 톤 제공 같은 합의(2007년 10·3 합의)는 핵 포기 이행과정에 따른 보상이자 경제적 핵 수요론의 대체재였다.


북한은 어떤 전제조건이 충족만 된다면 핵 포기의 진정성 있는 의지가 최소한이나마 있기는 한 걸까? 대북 핵 협상의 딜레마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있다’와 ‘없다’, ‘이런저런 조건을 채워주면 (핵 포기의 진정성 있는 의지가) 생길 것이다’와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의 괴리다.


전자 쪽에 서는 사람들은 비핵화의 걸림돌로 보수측의 경직된 사고와 미국의 비협조적 태도를 문제 삼는다. 후자 편에 서는 사람들에겐 김정은 정권이 몰락하지 않는 한 비핵화는 불가능한 것으로 본다. 이 갈림길에서 어디에 서느냐에 따라 북핵 문제의 기술적 해결 가능성 논쟁을 넘어 가치관과 정체성에 관한 색깔론으로 비화되는 현실이 핵을 머리 위에 이고 사는 지금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반면, 이제 미국의 조야는 북핵 문제에 관한 한 거의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는 듯하다. 대표적인 대북 유화론자 중 한 명이던 레온 시갈 박사 마저 북한은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고 실토한 것이 단적인 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25년의 북핵 역사를 통해 미국의 여야는 북한 문제에 관한 한 정당 간 시각차를 크게 좁혀 왔다.


어느 당이 집권을 하든 대북 정책의 차이는 미미할 것이란 의미다. 이는 부시 정권 8년을 통해서도 입증된 바다. 공화당도 그 전의 민주당과 현재 오바마의 민주당도 북한 문제에 관한 한 신뢰할 수 있는 행동이 선행돼야 한다는 원칙론에서 물러서지 않고 있다.


미래에 대한 낙관적 기대치를 잠시 접고 과거로부터 축적된 역사적 사실(fact) 속에서 교훈을 찾아보면 어느 쪽이 보다 객관적인 진실에 가까울까?


남한이 북한에 가장 유화적이었던 때는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시절 10년(1998. 2~2008. 2)간 이다. 2003년 8월부터 2007년 9월까지 만 4년 동안 여섯 차례(6차)의 6자 회담이 열리는 동안 총 80여 차례의 협상이 있었고 이 기간 중 9·19공동성명(2005년), 2·13합의(2007년), 10·3합의(2007년)같은 비핵화로 가는 3개의 핵심적 합의가 도출됐다.


하지만 또한 이 때 북한은 핵 보유를 공식 선언(2005년 2월)했고 대포동 2호를 발사(2006년 7월)했으며 1차 핵실험을 감행(2006년 10월)했다. 이명박 정부로 바뀐 2009년 5월엔 2차 핵실험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럴진대 북한의 핵 포기 의지는 존재하기나 한 걸까? 이제까지 북핵 사태의 진행과정은 오로지 남한의 경직된 보수와 미국의 책임이라는 비판이 맞는 지적일까? 일련의 시간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북한의 핵 개발은 6자 회담이라는 정치적 협상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의 핵 지휘통제 계통은 철저히 중앙집권적이며 최고지휘자의 명령으로만 진행됐다는 것이 그간 핵 연구자들의 결론임을 감안할 때 노동당의 협상과 북한 군부의 핵 개발은 별개의 일정표를 밟아 왔다는 편이 맞겠다. 핵 개발이라는 핵심 사안에 대해 당과 군부가 동일 지도자의 지휘 아래 개별 접근(two-track approach) 방식으로 진행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6자 회담이라는 다자협상 틀은 결국 북한을 포함한 6개국이 테이블 위에서 서로 시간을 끌기 위한 룰렛 게임에 불과했다. 언젠가는 총알이 발사될 것이나 그 순간을 게임을 통해 지연시키는 도박판이다.


정리하자면 상황은 과거와 유사해졌다. 그리고 주변 강대국은 다시 한번 마지막 룰렛을 돌리려고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상황(situation)을 바라보는 각국의 맥락(context)은 바뀌었다. 미국을 위시하여 중국도 이를 잘 인식하고 있는 듯 보인다. 정녕 핵과 미사일을 끌어안은 북한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역사의 시계추는 서서히 끝을 향해 달리고 있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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