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현지시각) AFP 통신이 오스트리아에서 만난 북한의 전직 군수담당 정보기관원 김종률 씨(75)의 얼굴에선 가족에 대한 그리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북한의 모순을 폭로한 보람 등이 미묘하게 교차했다.
20년간 오스트리아 등 유럽 주요국에서 군수.산업 물자를 사들여 북한에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김 씨는 최근 ‘독재자에게 봉사하며(At the dictator’s service)’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출간, 김일성 주석의 사치스러운 사생활을 폭로했다.
김 씨는 “내가 빛의 영역으로 나오긴 했지만 언제까지 내게 태양 태양이 비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며 “짧은 시간이 될 것 같다”고 운을 뗐다.
충성스러운 당원이었던 그는 1994년 10월18일 오스트리아에서 죽음을 위장하는 방식으로 탈북했다. 안위를 염려해 탈북 계획은 가족에게도 일절 얘기하지 않았다.
1994년 김 주석의 사망은 그에게 희망을 줬다. 김 주석이 죽으면 혁명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했다. 바라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김 씨는 그의 가족과 관련된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이 매우 위험스러운 행동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김 씨는 집에 TV 5대를 갖고 있다. 북한에 대한 뉴스를 더 많이 접하려고 일본어를 독학하기도 했다.
지금은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거의 버렸다.
그는 “아들과 딸, 내 가족을 죽기 전에 보는 것이 마지막 소원인데,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을 것 같다”고 털어놨다.
그는 북한의 독재정권이 당분간 붕괴할 가능성이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김 씨는 16년간을 오스트리아에서 숨어지냈다. 외부에 드러나지 않으려고 친구도 만들지 않았다. 탈출 직전에 빼돌린 돈으로 생계를 유지해 왔다.
그가 통상 산업.군수 물자를 사들인 곳은 오스트리아 빈이었다. 빈은 은행 계좌의 비밀성이 비교적 잘 지켜지고 무역이나 공항 통제가 상대적으로 느슨한 곳이었다.
외교관 여권을 갖고 있던 김 씨는 서류 가방에 현금을 잔뜩 넣고 몇 개월씩 유럽 지역에서 쇼핑(?)을 했다.
30%의 프리미엄을 주면서 물건이 어느 나라로 가는지 따위엔 관심이 없는 소규모 기업들과 주로 거래했다.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독일.프랑스.체코 등의 기업이 거래 대상이었다.
구입한 물건은 빈 주재 북한 대사관을 경유해 재포장된 후 허위 선적 서류와 함께 이미 매수된 해당국 세관 관계자의 도움을 받아 북한으로 이송되곤 했다.
북한에 대한 책을 출판한 것이 생명에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도 잘 알고 있다.
그는 “결국은 죽겠죠. 하지만 왜 의미 없이 죽어야 하죠?”라고 반문했다.
김 씨는 오랫동안 기다렸다면서 그래도 남겨놓고 갈 이 책이 있어서 위안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나도 두렵습니다. 나를 죽일 총탄이 어디서 날아올지 몰라요”라며 불안해했다. 하지만 그는 후회는 없다면서 조국을 등진 것은 100% 맞는 결정이었다고 강조했다.
김 씨는 “나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내일이나 모레부터 나는 또 사라질 겁니다”라고 말했다. /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