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중국인의 북한 방문기 “김뚱보 일찍 권력 넘겨야”






▲비행기에서 맞이한 첫번째 식사
나는 북한입국비자를 신청한지 2주 만에 북한에 들어갈 수 있었다. 베이징과 평양, 중국과 북한은 격세지감이라고 할 정도의 큰 차이가 있었다.


북한행은 생각보다 너무나 순조로웠다. 나의 여권에 일본비자가 붙어있어 북한에 입국하는데 영향이 있을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예를 들면 작은 방에 들어가 심문을 받는다거나, 입국이 거절된다거나 하는 일들) 모든 것이 너무나 순탄했다.


내가 앉은 고려항공기는 승객의 대부분이 북한사람들이었는데 외국에 경기를 하러 나온 선수들도 있고 정부의 관원으로 돼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밖에 일부 서양인의 경우는 기자나 외교관인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중국인들도 몇 명 보였는데 관광 아니면 교류활동에 참가하는 사람들로 보였다. 그 중의 한 중국인은 현재 짓다만 유경호텔의 유리외벽공정을 맡아 하고 있다고 했다.


항공기는 구소련의 낡은 기종으로 소음이 무척 요란했다. 스튜어디스들은 하나같이 통통한 몸매로 전혀 식량위기를 겪고 있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란 느낌이 들지 않았다. 북한에서 본 신기한 것은 남자들은 까맣게 야위어 있는데 반해 여자들은 희고 통통한 모습들이었다는 것이다.


진동이 좀 있긴 했지만 착륙은 안전하게 이루어졌다. 항공기는 활주로에서 한참동안 이동하였는데 이동 중 작은 다리를 지나기도 했다. 착륙장 바로 곁에 경작지가 있었고 농사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해외경기를 마치고 돌아온 선수들이 상을 탄 모양으로 공항에서 즐겁게 기념촬영을 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의 공개적인 촬영과 몰래 촬영이 시작되었다.  






▲비행기 안에 비치된 영자신문인 평양타임즈


세관을 통과할 때 세관직원은 나의 여권을 대충 훑어보더니 아무 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도장을 찍어주었고 내가 상상했던 여러 가지 장애는 발생하지 않았다. (사실 슬그머니 실망되기도 했다.) 안전검사는 좀 엄격하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여행용 가방을 열어보지도 않고 다만 핸드폰을 휴대하고 있는지만 물었다. 나는 고스란히 핸드폰을 꺼내주었고 세관직원은 쪽지를 적더니 출국 시 그 쪽지로 핸드폰을 찾아가라고 했다. 물론 뒷이야기 이기는 하지만 출국 시 동일한 세관직원을 만났고 역시 아무런 검사도 없이 나를 통과시켜 주었다.


세관을 빠져나오니 이곳저곳에서 플레시세례를 받았다. 선수들을 마중하러 나온 가족들인 것 같았다. 우리 일행의 옷차림이 특이했는지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댔다.


사실 북한이었기 때문에 북한인들이 흔히 보지 못하는 옷차림이었을 뿐 특이할 것도 별로 없었다. 그 후 며칠 동안 나는 옷차림 때문에 늘 주목받는 대상이 되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의 카메라 역시 디지털카메라였다는 점이다.


내가 접촉한 첫 북한인은 세관을 나서자마자 만난 나의 안내원이었다. 우리는 이름을 확인하고 차에 앉아 공항을 떠났다. 안내원 정 씨(프라이버시를 위해 가명을 썼음을 밝혀둔다). 40대 전후의 북한남자로 때론 러시아어를 쓰고 때론 영어를 썼는데 중국어도 할 줄 알았다.


정씨는 내가 가장 오랫동안 사귀고 합작을 한 북한인으로 굉장히 총명했고 노련하여 심지어 얍삽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심성이 무척 착한 사람이었고 북한이 중에서는 세상구경을 많이 한 사람이었다. 그는 구소련에서 유학을 했고 현재 어느 회사의 중요한 기술직을 맡고 있었다.


정씨는 사람 사귀는데 능란해 우리와 웃고 떠는 사이 금세 서로 친해줄 수 있었다. 관광지 혹은 중국대사관 같은 명소들을 지날 때면 정씨는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우리가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겠다고 하니 정씨는 사진을 찍을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 급해할 필요가 없다고 말렸다. 훗날 그는 과연 약속을 지켜 우리들을 데리고 도처로 다니며 사진을 많이 찍을 수 있었다.








양각도호텔의 내부 모습
양각도호텔에 도착하여 그는 우리에게 호텔방을 배정하고 나서는 우리의 여권을 거둬갔고 우리는 그때부터 자유를 잃은 생활을 하게 되었다. (여권은 우리가 북한을 떠날 때 돌려받았다.)


일 때문에 북한에 왔건만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안내’를 받았고 사전에 정해진 일정대로 움직여야만 했다. 우리 개인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오로지 호텔 내부와 호텔 밖 담장 안이었다. 한마디로 우리는 양각도호텔을 떠날 수 없다.


그날 저녁 양각도호텔의 중식당에서 우리를 위한 환영만찬이 있었다. 우리를 책임진 안내원은 모두 셋이었는데 A, B, C 로 부르는 것이 편할 것 같다.


이들은 외국어가 무척 뛰어나 거의 완벽한 미국식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A는 영어, 불어, 일본어를 할 수 있었는데 부모님들은 일본에서 온 재일교포였다. B는 영어가 유창했고 체격이 크고 뚱뚱한데다 피부도 희어 북한인 같지 않은 외모였다. C는 중국에서 유학을 했던 경력 때문에 입만 열면 중국의 동북사투리가 튀어나왔고 거의 중국 사람이 다 된 것 같았다.


만찬석상의 분위기는 매우 열정적이었고 이들은 부지런히 나에게 음식들을 권했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소주와 맥주를 마셨다. 예의를 지키기 위하여 나도 맥주를 조금 마셨다.


시간이 흐르면서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갔고 우리와 북한쪽 사람들은 점점 더 친해졌다. 중국과 일본에 관련된 일들도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나와 A가 일본어로 몇 마디 이야기를 하자 정씨는 곧바로 ‘남들이 알아들을 수 없다’며 중단시켰다.


이는 외국인과의 교류와 관련된 규정으로 북한인들이 외국인과의 교류는 반드시 2명 이상의 북한인들이 함께 있어야 하고 북한인들은 상부의 허가를 받아야 외국인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이들 안내원들은 모두 외국인과의 대화를 허가받은 사람들이지만 반드시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야 했는바 상호 간에 감시하는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이다. 안내원들은 또 우리의 모든 언행을 상부에 보고해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그때 안내원 중의 A가 떠나게 되었는데 오랜 시간 함께 한 사이인지라 많이들 섭섭해했다. 게다가 나를 환영하는 만찬이었기에 A는 식사 후 호텔의 최고층 회전카페에 가서 커피나 마시면서 그의 ‘여자 친구들’인 미모의 써빙녀들을 구경하자고 제안했다. A는 사실 나이가 나보다 많이 어려 85년생의 동생뻘이었다. 아마 여자 친구를 고르기 위한 참모역할을 나에게 부탁한 모양이었다.


북한레스토랑의 써빙녀들은 모두가 굉장한 미인들로 그 중 다재다능한 여자도 한 명 있었는데 피아노연주 실력이 가히 일품이었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면서 피아노 한곡 쳐달라고 부탁했다. A는 그곳에서 무척 인기가 많았는데 언변이 좋기 때문인 것 같았다. 어디서나 말을 잘하는 남자들이 인기가 있는 것 같았다.






▲식당입구에서 본 웨이트리스


북한의 젊은이들이 연애와 혼인에 대한 생각들이 중국처녀들과 비슷한 것 같았다. A의 말에 의하면 여자 친구가 자기에 대한 가장 큰 불만이 일이 너무 많아 데이트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란다.


나는 중국어를 잘하는 C에게 물었다. C는 나와 동갑이었고 올해 금방 결혼을 한 새신랑이었다. 나는 C에게 아내와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C의 말에 의하면 그들 두 집안은 오랫동안 친하게 지낸 사이었는데 C는 아내 될 사람을 잘 알지 못했고 그가 중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니 집안사람들의 주선으로 만났고 한동안 사귀다 마음이 맞으니 결혼을 했다는 것이었다.


중국의 중매결혼과 비슷한 경우였다. 북한에서는 국가에서 결혼한 사람들에게 직급과 직위 등 조건을 따져 주택을 제공해 주고 있었다. 한번은 지하철역 부근의 고층아파트를 지나게 되었는데 정씨가 자기의 집이 바로 그곳에 있다고 말해주었다. C의 소개에 따르면 그 아파트는 지도층만 살 수 있는 아파트인데 수없이 많은 노력과 분투를 통해야만 지도층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했다.


후일 알게 된 바에 의하면 사실 C의 목표는 지도층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중국에 가서 생활하는 것이었다. C는 국가의 파견을 받아 중국에 가서 상주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는 중국어를 배웠기에 중국에 가서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고 중국은 발전이 빠르고 자유로운 공간이어서 그에게 있어서는 최상의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A가 떠나고 D가 새로 안내원으로 왔다. 안내원의 숫자는 반드시 보장되는 것 같았다. 일에 있어서 내가 가장 많이 접촉하는 사람은 역시 정씨였다. 오색찬란한 생활을 경험한 적 있는 정씨는 일반인들에 비해 훨씬 총명했고 팔방미인이라고 할 수 있었으며 자산계급의 생활에 대해서도 포용할 줄을 알았다.


인터넷에서는 북한에 사우나와 카지노 등 모든 것이 다 있다고 했다. 분명 있기는 있었고 양각호텔의 지하 1층에 사우나가 있었다. 이곳은 북한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었고 일꾼들도 모두 중국에서 초빙해온 사람들이었다.


나는 중국 돈 144위안을 주고 사우나에 들어갔다. 비싼 가격에 북한의 사우나가 어떤 모양인지 궁금해졌다. 분명 특별한 데가 있겠지 하고 생각했다. 호텔 내부에 있는 일반 사우나의 가격은 중국 돈 30위안이었다.


하지만 이른바 고급사우나에 들어선 나는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분위기가 무척 썰렁했고 시설은 노후했으며 오로지 구석 쪽에 두개의 작은 찜질방이 있었다. (비싼 이유가 아마 이것 때문이었으리라) 한마디로 중국의 평범한 목욕탕도 이보다는 좋을 것이고 고급스러운 사우나에 비하면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144위안이면 중국의 고급 사우나를 이용할 수도 있는 금액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북한에는 뭐든 다 부족한 판에 이런 시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 같았다. 카지노는 사우나 바로 곁에 있었는데 들어가 보니 100제곱미터 정도로 무척 작아보였다. 당시는 비수기인지라 카지노 일꾼들은 한가하게 노닥거리고 있었다.


이처럼 특수한 오락시설들을 제외하고 북한인들도 출입할 수 있는 곳도 있었는데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특권층이라고 할 수 있다. 당구장, 탁구장, 수영장(수영장 안에는 안마방이 있었는데 가격은 1시간에 200위안 정도로 거의 일본의 가격에 맞먹었다. 이놈의 물가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밖에 볼링장도 있었다. 저녁에 심심해서 당구장에 가서 놀았는데 맥주도 팔고 있었다.






▲호텔내부 당구장


주말이 되니 정씨는 관광을 하자고 했다. 목적지는 주체사상탑과 만경대였다. 정씨는 우리들에게 깔끔하고 정중한 옷차림을 특별히 주문했다. 그들에게 있어 이 두 곳은 매우 공식적인 장소인 것 같았는데 희한한 볼거리를 찾으려고 했던 우리들의 기대와는 너무나 달랐다.


우리들의 탄 차가 주체사상탑광장에 도착하자 물건을 파는 중년의 여성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북한말로 ‘아줌마’라고 하는 같은데 정씨에 의하여 쫓겨났다. 아줌마들은 순순히 물러가 조용하게 계단에 앉았다. 그날 주체사상탑은 개방을 하지 않아 못 올라갔고 기념품상점에서 중국어로 된 소개를 봤다. 하지만 우리들은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 것 같았다.






▲주체사상탑광장에서 물건을 파는 중년 여성들


기념품 상점을 나오니 아이스크림가계가 보였다. 정씨에게 먹고 싶다고 하자 정씨는 흔쾌히 우리에게 북한에서 처음 먹어본 아이스크림을 맛보게 했다. 우리들 중 두 사람은 슬그머니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다.








▲옥류관의 차림표
지하철에서 내려 밖에 나오니 정씨가 옥류관 냉면을 먹자고 했다. 우리는 냉면에 흥미가 없었지만 정씨가 북한 최고의 냉면이라고 적극 추천해 먹어보기로 했다. 옥류관은 엄청 호화로운 건물로 꼭 마치 조선황제의 별궁 같았다. 듣자니 이곳은 수많은 외국지도자들도 다녀갔던 곳이란다.


안의 일꾼들의 외모나 기질도 뛰어나 보였다. 물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우리 십여명이 냉면을 한 끼 먹고 무려 100여 유로를 지불했다. 북한인들의 노임이 수십 원 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국가의 배급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니 이 수십 원은 푼돈이라고 해야겠다.


다 먹고 나니 사실 정말 최고의 맛인지 의심이 갔는데 중국에서 먹어본 냉면들과는 많이 달랐다. 그리고 가을에 먹기에는 냉면은 너무 찬 음식이었다.


호텔 맞은편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말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천천히 돌면서 사진도 찍고 하면서 얻기 힘든 휴가를 즐겼다. 평양은 너무나 아름다운 도시였고 소박한 아름다움은 북한에 오기 전 나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곳의 사람들과 그곳의 거리들은 모두 우리가 언젠가 한번 보았던 익숙한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떠날 날이 다가올수록 나는 더욱더 열심히 카메라셔터를 눌러댔다. 사실 나는 그곳을 떠나고 싶었고 아쉬움 같은 것은 없었다. 외부와 거의 단절된 삶은 우리로써는 너무나 적응하기 힘든 것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올 수도 있을 같았다. 목적은 어떠한 변화가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왜냐 하면 북한 같은 국가에는 엄청난 동력들이 내재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떠나는 날 정씨가 아침 일찍 나를 찾아왔다. 그는 말이 별로 없었다. 공항에 도착하자 정씨도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그를 통해 북한내부가격의 고려 삼을 샀다. 세관을 통과 할 때 정씨는 또 관계를 이용하여 아무런 검사도 받지 않을 수 있게 했다. 물론 나는 금지물품을 휴대하고 있지 않았다.


마지막 관문 앞에 이르러 나는 정씨에게 “정씨, 당신은 사실 참 좋은 사람인 것 같네”라고 말했다. 그러자 정씨는 그 트레이드마크인 교활한 미소를 띄면서 “그래요? 남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라고 했다. 감춰진 뒷마디는 사실 “좋은 사람 같아 보이지 않는데”였다. 그는 얼마 있지 않아 러시아로 출장을 떠난다고 했다. 러시아에서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여학생들이 광장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다.








▲사람들이 거리 사격오락장에서 여가를 즐기고 있다.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 고향집 방문한 사람들이 기념촬영을 하고있다.








▲호텔에서 판배되고 있는 음료와 술. 외국산 맥주가 눈에 띈다.

소셜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