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총련 ‘放聲大哭’

십 수 명의 대학생들이 팔을 치켜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겨울방학에 추운 날씨까지 겹쳐 외출마저 여의치 않을 터에 저 학생들은 무엇을 알리고자 저 자리에 섰을까? 대학생들이 들고 있는 피켓 하단에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하 한총련)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제6회 북한인권ㆍ난민문제 국제회의’가 시작된 2월 14일 서강대에서 한총련은 이 회의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순간 가슴은 답답해지면서 눈앞이 흐려졌다. 지그시 눈을 감으니 얼마 전에 보았던 회령의 벽보가 흑백 슬라이드 필름처럼 떠올랐다. 북한인권 개선운동을 반대하는 한총련의 구호와 김정일의 야만적 독재를 규탄하는 ‘자유청년동지회’의 음성이 교차하며, 어지럽게 귓가를 맴돌았다.

한총련, 한민전 vs 자유청년동지회, 해바라기회

이런 비슷한 일이 90년대 중반에도 있었다. 평양 바로 위쪽에 평성이라는 도시가 있고, 이곳에 평성이과(理科)대학이 소재한다. 이 평성이과대학에서 ‘해바라기회’사건이 발발하였다. 해바라기회를 만들고 자유와 민주를 갈구하던 ‘북조선’의 청년들은 국가안전보위부에 발각되었다. 그들은 온몸이 발가벗겨진 채 부모와 가족들 앞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내 자식은 내 손으로 죽이겠다”며 아들의 귀를 물어 뜯었다고 한다.

차라리 죽임으로써 아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었을 것이고, 남아 있는 가족들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였으리라. 필자가 아직 한민전(韓民戰 ; 북한의 대남선전기구)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김정일의 지침에 따라 ‘운동’이라는 것을 하던 치욕의 1990년대 중반이었다. 시간이 지나서야 이 사실을 접하고 말을 잊었다. 마치 1987년 대학에 입학하여 광주의 영령들 앞에 ‘나의 무지를 용서하라’며 울었던 것처럼 나는 울었다. 분노도 분노려니와 내가 그 가해에 동참했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죄스러워 울었다.

무지가 죄였다. 광주의 진실도 뒤늦게 알았고, 해바라기회의 학살도 나중에야 알았다. 수백만의 죽음과 수천만 동포들의 비참한 처지도 한참 나중에야 알았다. 그 간격만큼, 그 간격에 존재했던 나의 열정과 노력만큼 북한 동포들과 한국 국민에게 죄를 지은 것이다.

밖에서 비난만 하지 말고 함께 토론해보자

나는 안다. 한총련 후배들의 가슴에 나라와 동포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혹한을 뚫고 거리에 섰음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욱 절실하게 부탁한다. 무지하지 말라. 사실을 확인하라. 필자가 겪었던 통탄할 오류를 그대들은 겪지 않을 수 있지 않은가?

6천명에 달하는 탈북자 몇 사람만 직접 만나보아도 저들의 처지를 알 수 있지 않은가! 아이들이 어떻게 죽어가는지, 여성과 늙은이들이 어떻게 유린되는지, 모든 인민들의 천부인권이 어떻게 무참하게 유린되는지 조금만 노력해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국제회의의 내용이 그렇게 마뜩찮다면 덮어놓고 반대할 것이 아니라, 엄동설한에 밖에서 떨며 피켓들고 고생할 게 아니라, 회의장에 들어와 함께 듣고 토론해 보면 되잖는가!

한총련 후배들은 지금 김정일의 인민학살에 침묵하는 것을 넘어서 인간방패로 나서고 있다. 히틀러의 나찌친위대처럼, 마오쩌둥의 홍위병처럼 그대들은 학살광란의 방패막이가 되어 있다. 부디 현실을 직시하라! 그리고 한총련의 선배들은 말하여야 한다. 우리의 후배들이 북한인권개선운동의 앞길을 막아서고 있는 지금, 김정일의 인간방패가 되어 학살광란의 동조자가 되고 있는 지금, “그것이 아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침묵 앞에 절망했던 1980년대의 기억을 잊지 말자!

마지막으로 김정일에게 경고한다. 더 이상 ‘남조선’ 청년학생들의 순결한 조국애를 당신의 범죄의 사슬에 끌어 들이지 말라! 그대는 이미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잔인함의 경지’를 충분히 보여주지 않았는가? ‘세계 최고의 독재자’라는 명성으로도 부족한 무엇이 남아있는가?

무릎 꿇고 비나니, 동포 영령들이여 나의 죄를 용서하소서. 엎드려 갈구하나니, 한총련 후배들에게 진실이 통하게 하소서.

최홍재 논설위원(자유주의연대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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