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지각변동..성큼 다가온 `평화체제’

지구상 마지막 남은 냉전의 섬, 한반도의 지각변동이 드디어 가시화하는 느낌이다.

아직 촉감이 덜하긴 하지만 6자회담에서 도출해낸 `2.13 합의’의 지향점은 일제 식민지와 분단,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냉전의 대결로 점철된 한반도에 ‘평화와 협력’의 새 질서를 구축하는 작업과 닿아있다.

한반도 비핵화라는 이슈를 넘어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북한정권이 미국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협상을 시작하고 일본과는 식민지배의 상흔은 물론 `납치문제’ 등 각종 현안을 한꺼번에 다루는 `대사(大事)’가 조만간 닥칠 현실이 됐다.

여기에 1953년 정전협정을 파기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다자간 협상채널도 곧 가동될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능성 저편에 있던 난제들이 어느덧 충분히 협상 가능한 문제로 탈바꿈한 것이다.

◇변화의 원동력은 북.미 ‘의기투합’= 지난 13일 끝난 제5차 6자회담 3단계 회의에 참가한 한 관계자는 “미국과 북한의 변화된 모습에 놀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급기야 미국의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는 다른 나라 대표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방코델타아시아(BDA)와 관련된 금융제제 문제를 30일내에 해결하겠다”는 공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또 김계관 부상 등 북한 대표단은 한국측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 ‘미국의 진정성’을 거론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 소식통은 “북한 대표단의 모습을 보면서 ‘제발 미국이 마음 바뀌지 않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하는 것같았다”고 말했다.

양측 대표단의 변화는 물론 워싱턴과 평양 수뇌부의 전략 변화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는게 외교가의 중론이다.

특히 워싱턴의 변화는 2002년 10월 `고농축우라늄(HEU) 문제’를 이유로 제네바 합의를 백지화했던 것과 비교하면 180도 바뀐 것이라 할 수 있다. 부시 대통령은 이미 지난해 11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함께 ‘종전 선언 문서에 서명할 수 있다’고 공개 천명했다.

그후 미국이 보인 태도를 보면 북한과의 직접대화를 거부하던 강경노선은 이미 오간데 없다. ‘6자회담의 틀내’라는 명분을 걸긴 했지만 베를린 북.미 회동은 6자회담이 열린 이래 중국의 중재없이 이뤄진 사실상의 미.북 직접협상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표면상으로 보면 HEU 문제에 집착하지도 않았고 북한이 그토록 원하는 BDA 문제에 대한 ‘성의표시’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미국의 변화는 물론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의 참패와 이라크 상황과 중동사태의 악화 등으로 부시 행정부의 입지가 좁아진 상황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국제적으로 관심을 끌고 있는 6자회담, 특히 북핵 문제에서 뭔가 가시적인 성과을 얻겠다는 전략적 선택이 강경파들을 줄줄이 몰아내고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힐 차관보로 연결되는 단선의 협상라인이 구축되는 원동력이 됐다는 분석이다.

`금지선(레드라인)’으로 설정했던 핵실험을 강행한 북한을 상대로 ‘통큰 협상’을 하려는 부시 행정부의 움직임에 대해 국제 외교가는 ‘부시의 충격’이라는 말로 비유하기도 한다. 냉전체제를 획기적으로 타개한 1970년의 ‘닉슨쇼크’를 빗댄 말이다.

폐쇄성을 자랑하는 북한 체제의 속성상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평양의 움직임도 적어도 ‘미국의 성의’를 놓치려하지 않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제네바 합의 때와 유사한 영변 핵시설을 주된 협상대상으로 하고, 보상조치로 대규모의 에너지 및 인도적 지원을 받으라는 미국의 제의에 북한이 마다할 이유는 별로 없어 보인다.

나아가 중국 개혁.개방의 선구자 덩샤오핑(鄧小平)이 90년대초 걸어갔던 `남순강화(南巡講話) 코스’를 지난해 1월 훓었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이번에 찾아온 ‘마지막 기회’를 활용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이번 6자회담 현장에서 읽혀졌다는 전문가들의 분석이 많다.

HEU 문제에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남측 대표단의 설득에 북한의 김계관 부상이 별다른 말없이 경청한 장면이나 대북 적대적 정책의 철폐 요구를 복잡하지 않게 제기한 북측의 모습은 평양 수뇌부의 지시 없이는 목격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결국 평양과 워싱턴 수뇌부가 선택한 방향이 맞아떨어지는 국면이다. 도중에 어떤 돌발변수를 만나 전체 구도가 흔들릴지 모르지만 적어도 상당기간 이런 현상은 유지될 전망이다.

◇ 변화의 에너지, 평화체제로 모아질 듯= 국내외 정치적 여건과 체제유지의 필요성(북한), 그리고 주변국의 정치외교적 역학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동아시아에 밀어닥친 변화의 에너지는 결국 평화체제로 모아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반도 평화체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할 다자포럼이 곧 가시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은 지난 21일 “6자 외교장관 회담에 이어 한반도 평화체제를 논의하기 위한 별도의 회담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외교가에서는 송 장관이 ‘염두에 두고 있는’ 평화포럼이 4월 중 개최될 것이며, 그 형태는 남북한과 미국, 중국의 외교장관이 참여하는 4자회담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6자회담 틀 내에서 열리는 6개국 외교장관 회담과 별도로 열리게 되겠지만 맥락을 감안할 때 ‘평화체제’라는 고리로 연결될 수 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시야를 넓히면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그리고 부시 대통령과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이 한자리에 모이는 ‘화려한 이벤트’로 가능한 일이 될 수 있다. 한국전쟁을 치른 적대국의 국가원수들이 모여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논의하는 것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 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반도의 변화기류를 재빨리 간파한 것인지, 송 장관을 비롯한 한국의 고위인사, 그리고 그들의 주된 파트너인 미국측 인사들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

당장 심윤조 외교부 차관보가 미국에 가 있고 ‘대북조정관’ 임명설이 나도는 존 네그로폰테 미 국무부 부장관도 다음달 초 한국과 일본, 중국을 차례로 찾는다.

그리고 송민순 장관이 직접 다음달 초 미국을 찾아 라이스 국무장관과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를 하게 된다. 아직은 추상적인 개념 단계인 `한반도 평화체제 포럼’의 구체적인 가동방안이 이 자리에서 본격적으로 다듬어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근 한미 양국의 외교를 실무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두 사람이 어떤 결과물을 내놓을 지 국제사회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한 소식통은 “지난해 11월 하노이에서 부시 대통령이 노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한국전쟁 ‘종전 선언 문서’에 서명하겠다는 뜻을 밝힌 적이 있다는 점에서 두 장관은 이미 양국 정상의 위임 속에 평화체제 논의와 관련된 속 깊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미 양국은 또 오는 23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국방장관 회담을 하게된다. 이 자리에서는 양국의 현안인 전시 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시기와 주한미군기지의 평택이전 문제 등이 집중적으로 논의해 모종의 결과를 도출할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구체적인 전작권 전환시기와 관련, 한국측이 주장하는 2012년 안이 채택될 가능성이 많이 거론되고 있다.

한.미 양국간에는 또 지난 한 해 동안 밀고당기는 협상을 벌여온 자유무역협정(FTA) 협상도 올 봄에 타결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남북간에도 중요한 대화의 움직임이 펼쳐지고 있다. 오는 27일부터 평양에서 남북장관급회담이 열리는 것이다.

`2.13 합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대규모의 쌀과 비료 등 인도적 지원이 결정될 경우 남북관계가 급격히 호전될 가능성이 크다. 일각에서 지속적으로 남북정상회담 얘기가 나오는 것도 향후 펼쳐질 남북관계의 전망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특히 이번 회담에서 한반도 평화체제와 관련된 논의도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이재정 통일부 장관은 21일 “2.13 합의사항을 신속히 이행할 수 있도록 요구할 계획”이라고 말한 뒤 `평화체제 전환’에 대해서도 논의할 것이냐는 질의에 “전반적이고 원칙적 논의들을 해야 할 것”이라고 답했다.

남북문제에 정통한 한 전문가는 “미국 수뇌부의 최근 움직임을 분석해보면 지난해 밀려왔던 핵구름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평화체제라는 새로운 이슈가 예정보다 빨리 뜨려는 것 같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에 사는 한국인이 진정 평화롭게 살 수 있는지, 그리고 남북교류는 정말 내용성있게 진행될 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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