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도발을 멈추고 대화에 호응하라던 정부의 잇단 제의가 무색하게 북한은 연신 탄도미사일 발사를 감행하며 ‘마이웨이’를 걷고 있다. 미국의 본토를 위협할 만한 핵·미사일 위력을 갖춤으로써 미북 협상시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는 동시에, 남한과의 비핵화 대화에는 응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내비치고 있는 셈이다.
북한이 29일 평양 순안 일대에서 발사해 일본 상공을 지나 북태평양에 떨어뜨린 탄도미사일은 특히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켜 유리한 전략적 조건을 확보하겠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란 분석이다. 한미일 대북제재에 개의치 않고 핵·미사일 능력을 고도화시키겠다는 뜻을 재확인한 것이다.
특히 중장거리탄도미사일(IRBM) ‘화성-12형’일 가능성이 제기되는 이번 탄도미사일은 지난 9일 미군기지가 있는 괌에 대한 ‘포위사격’ 검토 공언의 연장선에 있다고 풀이된다. 군 관계자는 “탄도미사일 발사를 통해 미 증원기지 타격 능력을 과시한 것으로 분석된다”고 진단했다. 일본 영공을 지나가도록 설계한 것 역시 일본을 자극함으로써 주변국 긴장 수위를 높이기 위한 일환으로 보인다.
아울러 이번 발사는 북한이 대화 국면 모색을 위해 도발 수위를 조절할 것이란 정부의 전망을 뒤집는 수순을 밟았다. 북한이 26일 한반도를 겨냥해 단거리 미사일 세 발을 발사했을 때도 청와대 내부에선 ‘북한이 저강도 도발로 상황을 지켜보다 국면 전환을 꾀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실제 청와대 고위 관계자도 당시 기자들에게 “심각한 도발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29일 이뤄진 발사는 여러모로 대형 도발로 읽힐 여지가 있다. 우선 북한이 IRBM급 이상의 탄도미사일을 정상각도로 쏜 것은 이번이 처음인 데다, 평양 순안 비행장 일대에서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것도 처음이다. 북한이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조준해 타격할 수 있다는 경고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무엇보다 이번 탄도미사일 발사는 통일부 장관과 외교부 장관이 북한 도발 중단시 개성공단 재개나 비핵화 대화가 가능할 것이라며 비교적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은 지 불과 며칠 만에 이뤄졌다. ‘대화의 문은 열려있다’는 정부의 일관된 메시지가 당장 핵무장이 시급한 김정은 정권에게 그저 수사에 불과할 뿐, 도발을 멈추고 대화로 복귀할 만한 지렛대가 되진 못하는 게 아니냐는 평가가 나오는 대목이다.
앞서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25일 사단법인 통일미래포럼이 주최한 포럼 강연자로 참석한 자리에서 “북한 핵 문제에 따른 제재 국면에 변화가 있다면 무엇보다 개성공단 재개 문제를 우선 과제로 풀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28일 내신 브리핑에서 “지금부터 10월 중 있는 주요 계기일(10·4선언 10주년, 10·10 당 창건일 등)까지 상황을 잘 관리한다면 비핵화 대화를 위한 외교가 작동할 공간이 생길 수 있을 것”이라 말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일각에선 정부가 ‘대화와 압박을 병행하겠다’는 기조에 얽매인 나머지 되레 한반도 상황 관리의 기준조차 모호해 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호응은커녕 위협적 언사를 거듭하는 북한에 ‘대화 복귀’를 촉구하다가 탄도미사일 발사 등 도발에 나설 때야 반짝 ‘도발 대응’을 강조하는 모습이 오히려 대북기조의 혼선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
무엇보다 북한의 도발 국면에서도 해법은 ‘대화’라는 일관된 입장과는 달리, 정작 정부가 내놓을 수 있는 구체적인 대화 재개 방안은 부재하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문 대통령이 거듭 ‘한반도 운전자론’을 천명해왔지만, 정작 북한이 도발 수위를 조절하며 국면 전환을 꾀할 가능성에만 주목하고 있다는 평가다. 대화 카운터파트인 북한의 호응을 이끌어낼 마땅한 카드를 갖고 있지 못한 채 ‘대화 기조’라는 상징성만 부각하고 나선 결과란 지적도 나온다.
북한도 남한의 대화 재개 구상에 노골적인 비난을 이어가는 모습이다. 북한 노동신문은 27일 ‘제 푼수도 모르는 가소로운 대화의 조건 타령’이란 논평을 통해 “남조선(한국) 당국은 그 무슨 운전석이니 뭐니 하며 처지에 어울리지도 않는 헛소리를 하기보다는 차라리 자기 몸값에 맞는 의자에 앉아 입 다물고 있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처사”라고 주장했다.
신문은 이어 “남조선 당국은 대화를 거론할 아무런 명분도, 초보적인 자격도 없다는 것을 모르고 주제넘게 핵문제를 내들고 ‘대화의 조건’이니 뭐니 하며 푼수 없이 놀아대고 있다”고 비판했다. 결국 대화든, 충돌이든 미국과 하겠다는 북한의 ‘통미봉남(通美封南, 한국 배제하고 미국과 직접 협상)’ 전략 앞에서 정부가 보다 더 실질적인 대북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는 과제를 떠안게 됐다.
이와 관련, 통일부 당국자는 29일 기자들과 만나 “문제 해결은 대화를 통해서 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정부는 궁극적인 문제 해결의 방향으로 가도록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다만 구체적인 노력 방안을 묻는 말에는 “큰 틀에서 베를린 구상을 통해 한반도 신평화비전을 (추진하고), 후속조치로 상황에 맞게 최대한 노력한다”는 원론적 대답으로 그쳤다.
한편 강 장관은 이날 오전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과 전화 통화를 하고, 북한 탄도미사일 발사 상황 평가 및 대응 방향과 관련해 협의했다고 외교부가 밝혔다.
조준혁 외교부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양 장관은 그간 북한이 도발을 중단할 경우 다른 기회가 가능할 것이라는 점을 공개적으로 밝혀 왔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연이어 도발을 지속하고 있는 데 대해 깊은 실망을 표하고 강력히 규탄했다”면서 “한미 간 긴밀한 공조를 통해 안보리 차원의 강력한 대응을 비롯하여 단호한 조치들을 취해나가기로 했다”고 전했다.
안보리는 한미일 3국이 공동으로 긴급회의 소집을 요청한 데 따라 뉴욕시간으로 8월 29일 오후 긴급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