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공동사령부는 미군철수 쉽게하려는 것”

미국의 닉슨 행정부가 닉슨독트린에 따라 주한미군을 감축할 때 전력공백 보완책으로 1971년 7월1일 창설했던 한미 제1군단에 대해 헨리 키신저 당시 미 국무장관은 중국측의 문제제기에 “주한미군의 철수를 더 쉽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답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미 국무부가 지난주 발간한 ’미국외교사료집 1969-1976년 제17권’ 가운데 중국(1969-1972) 편에 따르면, 미·중수교에 앞서 1971년 7월10일 키신저와 저우언라이(周恩來) 당시 중국 총리간 이틀째 면담에서 저우언라이는 주한미군의 철수를 요구하면서 “미국이 지금 미군을 한국군과 섞었다(mix)”며 한미 제1군단 창설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키신저는 “아니다”고 말했으나 저우언라이는 “언론에 보도된 것이다. 미군이 사령관을 맡고 한국군이 부사령관이 된다는 것이다”고 거듭 제기했다.

그러나 키신저는 “공동사령부(joint command)는 새로운 정책이 아니다”며 “그 목적은 우리의 철수를 더 쉽게 하기 위한 것이지, 우리의 대한 군사주둔(commitment)을 늘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저우언라이는 “그러나 북한의 반대가 커질 것이며, 우리 역시 반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미 제1군단은 1969년 발표된 닉슨독트린에 따라,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 계획에 의해 1971년 3월 제7사단이 철수한 후 전력공백을 메우기 위해 시한부로 한미 야전군이 공동사령부를 만든 것이다.

한미연합사 역시 카터 행정부가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할 때 미군 철수에 따른 보완책으로 미국이 제안해 한국측이 받아들인 지휘체제인 만큼, 당초 창설 배경만으로 보면 한미 제1군단처럼 주한미군의 철수를 막는 장치가 아니라 미국의 철군계획을 용이하게 이행하기 위한 보상책인 셈이다.

키신저는 1971년 10월21일 리처드 닉슨 당시 미 대통령에게 자신의 2차례 걸친 방중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저우언라이 총리와 대화 내용을 설명하면서 “한국이 북한을 공격하도록 부추기지 않을 것임을 (중국측에) 분명히 하고, 한국의 북침이 분명한 경우 우리의 상호방위조약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말했다.

키신저는 또 “미군이 한국에 있는 한 어떠한 경우에도 한국의 군사공격을 허용하지 않을 것”임을 저우언라이에게 말했다고 닉슨에게 보고했다.

1972년 6월22일 키신저와 저우언라이간 대화에선, 저우언라이가 미군이 철수하면서 무기를 남겨두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 때문에 거기서 군비경쟁이 일어나지 않겠느냐”고 하자 키신저는 미·중 양국이 남·북한에 무기 제공을 자제하는 “비공식 양해”를 제안하기도 했다.

이 대화에서, 저우언라이는 “한국은 지금 군사적으로 매우 강하고, 전투 경험이 풍부하다. 미군 2만명을 철수했지만 무기를 남겨두고 있어 한국군이 더 강해지고 있다”며 “너무 많은 무기를 주지 않는 게 가능하지 않느냐. 당신들이 그렇게 하면 우리도 북한에 더 많은 무기를 줘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에 키신저는 “그 문제를 살펴보겠다”며 기존 프로그램은 바꾸기 쉽지 않지만 “특히 우리가 무기를 주는 것을 상호 자제한다는 비공식 양해를 할 경우 새로운 공약(commitment)은 피할 수 있다”고 답했고, 저우언라이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남북한이 평화접촉을 하도록 장려할 수 있다”고 화답했다.

이 외교사료집 가운데 키신저-저우언라이 대화록, 닉슨-저우언라이 대화록 등은 비밀해제된 2000년대 초부터 일부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기 시작했다.

이중 백두산 천지를 북한과 중국이 양분키로 합의했다는 저우언라이의 말과, 한국전 때 부통령으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만나 한국군의 북진을 막았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눈물을 흘렸다는 닉슨의 비화 소개, 남북한 사람들이 “충동적”이라는 닉슨의 평가는 이미 지난해 김태완씨의 박사학위 논문을 통해 알려졌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