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제안, 김정일 앞 ‘부시친서 작전’ 불발”

노무현(盧武鉉) 정권 발족 초기 한국 정부의 제안으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북한의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 앞으로 “군사공격을 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는 친서를 보내는 ‘작전’이 추진됐으나 불발에 그쳤다고 일본의 한 칼럼니스트가 주장했다.

또 노 정권 출범 1주일 후인 지난 2003년 3월 동해 상공에서 미군 정찰기를 북한 전투기가 추격, 한때 16m까지 접근했던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에서 칼럼니스트로 활약중인 후나바시 요이치(船橋洋一.62)씨가 북핵위기가 진행된 지난 4년간의 궤적을 취재해 20일 발간한 ‘조선반도 제2차 핵위기'(아사히신문사刊)라는 책 속에 담겨있는 내용.

한.미.일 3국은 물론 중국과 러시아 등 관련국 관계자들을 만나 광범위한 취재를 벌였다고 저자는 밝혔다.

저자는 아사히신문에 기자로 입사한 뒤 베이징(北京)특파원과 워싱턴 특파원 등을 거쳐 정년 퇴직 후 지금은 칼럼니스트로 몸담고 있다.

방북을 시작으로, 6자회담 미국 수석대표를 지낸 제임스 켈리 748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전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과 임동원 전 통일부장관의 방북, 6자 회담 개시와 표류, 김정일 중국방문 등에 대한 외교 뒷얘기를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북핵 해결을 위한 그간의 모든 노력이 최근 북한의 핵실험 발표로 물거품으로 돌아갔다고 정리하면서, 이 과정에서 북한은 물론 미국, 한국, 일본이 모두 많은 기회를 잃어버렸으며, 중국만이 유일하게 기회를 챙긴 셈이 됐다고 평가했다.

그는 미국의 조지 부시 정권에 대해, 지난 2002년 10월 켈리 대표의 방북 때 고농축우라늄(HEU)에 관한 일방적인 최후 통고를 한 점과 ‘경수로 제공의 논의를 적당한 시기에 한다’는 외교적 표현을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작년 9월의 6자회담 공동성명을 지키지 못한 점을 실패 사례로 지적했다.

또 한국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기회를 잡으려 한 나머지 한.미 동맹과 한.미.일 협조에 문제를 초래했다고 말했다.

저자는 이어 일본에 대해서는 극적으로 추진했던 일.조 정상화 이니셔티브를 끝까지 살려나가지 못한 점을 들었다. 북한에 대해서는 1990년대를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하면서 21세기 들어서도 계속 기회를 상실해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중국은 2차 핵위기 때 당사자로서 직접 개입해 이데올로기적 색채가 농후했던 한.미.일 3국과는 달리 비(非)이데올로기적인 접근으로, 실무적 외교를 펼쳤다고 평가했다.

▲ “군사공격 않는다”- 김정일 앞 ‘부시 친서’ 작전 실패
한국측의 아이디어로 부시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앞으로 ‘친서’를 보내는 작전이 계획됐으나 결국 불발됐다. 아이디어는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 직후인 2002년 12월 발족시킨 ‘정권인수위’에서 나왔다.

이른바 ‘친서 작전’의 핵심 내용은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군사공격은 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는 대신 김정일 위원장은 핵포기를 약속하는 것이다. 만약 이 작전이 성공했다면 플루토늄을 통한 북한의 핵개발을 평화이용에 한정, 국제 관리체제 아래 두는 것도 검토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 구상은 노 정권 탄생 후 이종석이 미국측에 비밀리에 타진했다. 미국에서는 이 안에 관심을 보이는 움직임도 있었다. 초안의 밑그림까지 만들어졌다. 관계자들은 친서에 ‘친애하는 미스터 김정일’이라고 쓸지, ‘친애하는 김정일 위원장’으로 쓸지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정일 위원장을 매우 싫어한다고 공언한 부시 대통령에게 누가 이 이야기를 꺼낼지가 문제였다. 이종석이 접촉한 백악관의 일부 인사들은 이 문제에 관심을 보였지만 상부에서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결국 ‘결정 유보’로 끝났다.

이종석은 각국 정상이 모이는 6자회담까지 계획했으나 이 역시 실패로 끝났다.

▲ “北 농축우라늄 완전가동시 핵무기 연간 2-3개 제조”
미국 고위관계자에 따르면 파키스탄은 1998-1999년에 걸쳐 북한에 P1, P2 등 2종류의 큰 원심분리기 20개 정도를 팔았다. 모두 시험용이었다. 클린턴 정권도 뒤늦게 이를 알았다. 북한이 조달한 강화알루미늄관의 두께는 268㎜였다. 점차 원심분리기의 조달규모가 커졌다. 독일선박이 3천-4천개의 (북한용) 분리기를 옮겼다는 정보를 미국 당국이 입수했다. 북한은 전부 1만개 가량의 분리기분을 발주한 것으로 파악됐다.

미 당국은 2002년 봄부터 CIA를 중심으로 태스크포스를 발족, 파키스탄과 북한 사이의 핵커넥션 정보를 본격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주로 전파.통신 탐지를 통해 ‘버찌 20상자 주문합니다’ ‘버찌 20상자 도착합니다’ 등 양측에서 오간 대화를 입수했다.미 당국은 ‘버찌’가 원심분리기라고 판단했다.당시 미국이 파악했던 정보는 매우 구체적이다.

북한의 한 기관이 1999년 이후 파키스탄형의 원심분리기를 가동하는데 필요한 특수한 윤활유와 공업용접착제를 조달해왔음을 알아냈다. 북한은 이 시점부터 원심분리기의 연구개발에 뛰어들었다. 북한은 2000년말 농축우라늄계획을 추진키로 결정, 원심분리기 시설을 건립했다. 2002년까지 적어도 2천600개 이상의 파키스탄형 대형 원심분리기를 설치하기 위해 필요한 특수철강을 입수했다.

이 원심분리기 시설은 2004년말까지 핵무기를 제조하는데 충분한 고농축우라늄을 생산할 수 있다. 이 규모의 농축우라늄시설을 완전 가동하면 연간 2-3개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다. 농축우라늄시설은 지하에 있을지 모르나 장소는 모른다. 북한은 정제우라늄에 그치지 않고 육불화우라늄(UF6)을 스스로 제조하는 능력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리비아가 대량살상무기개발을 포기, 국외로 반출했을 때 그 안에 포함됐던 2톤의 육불화우라늄은 북한에서 제조, 파키스탄을 거쳐 리비아로 건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이즈미 방북.납치협상 北 주역 ‘미스터 X’는 金 哲”
일본의 다나카 히토시(田中均) 전 외무성 심의관은 2001년 11월17일 중국 다롄(大連)의 한 술집에서 북한 인사를 만나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 협상을 시작했다. 상대인 북한측 인사는 자신을 “김 철(金哲)”이라고 소개하며 “국방위원회에 소속돼있다”고 밝혔다. 그는 “나는 외국과의 협상은 이번이 처음이다”고 했으며 헤어질 때 자신의 휴대전화와 사무실 번호를 알려주었다,
하지만 고이즈미 방북 후 일본에 일시귀국했던 일본인 납치피해자들이 눌러앉은 뒤 정권내 그의 입지 약해졌다. 이후 다나카 전 심의관은 일본에서 지금까지 ‘미스터 X’로 알려진 이 인사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응답이 없었다. ▲ “미.북 일촉즉발 위기”
이 책에 따르면, 미.북 항공기의 충돌위기는 2003년 3월2일 발생했다. 북한의 미그 29기 2대와 미그 23기 2대가 긴급 발진, 그중 한 대가 동해상에서 정찰임무를 수행중이던 미 공군 전략전자정찰기(RC-135)를 추격해 16m까지 다가갔다.

당시 미그전투기에는 표적기의 엔진에서 발산하는 열을 추적하는 공대공미사일이 장착돼 있었다. 오키나와(沖繩)기지를 발진한 미군 정찰기는 당시 정찰위성으로는 수집할 수 없는 유무선 통신 등 미사일 실험 준비 상황을 정찰하는 임무를 띠고 공중급유를 받아가며 북한의 동해안을 정찰중이었다.

북한은 이 사건이 있기 전 미군에 대해 종종 경고를 했었다. 이 일이 있은 지 20여일후 북한은 중앙통신 보도를 통해 미군 정찰기가 북한 영공을 침범했다고 비난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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