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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인권문제와 관련하여 논쟁의 중심은 물론 현재 한국 내부에 있다.
그 지형을 조감하면 보수 혹은 우파라고 불리는 진영과 진보 혹은 좌파라고 불리는 진영이 서로 대립하는 형국이다. 해서 우파가 북한인권문제를 제기하면 그것은 곧바로 좌파에 대한 공격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바로 그런 이유로 북한인권문제의 제기와 김정일정권에 대한 비판을 ‘이념논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현재 한국의 우파와 좌파 진영 모두에 공통되는 현상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북한인권문제가 ‘이념논쟁’의 대상이 된다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왜냐하면 평화 시에 발생한 300만 명의 아사자와 수십만으로 추산되는 강제수용소의 희생자에 대해서는 어떤 논쟁도, 따라서 어떠한 이념논쟁도 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북한인권문제는 선과 악, 정의와 불의가 선명하게 갈라지는 이분법이 적용될 수 있을 뿐, 상대주의적 가치 판단의 그림자조차 낄 여지가 없는 것이다. 김정일정권 치하의 북한에서는 2차대전 후 뉘른베르그 전범재판의 대상이었던 ‘인간성에 대한 범죄’와 동일한 성질의 범죄가 북한인민을 대상으로 자행되고 있고. 만일 한국의 좌파와 우파, 보수와 진보 어느 쪽을 막론하고 히틀러와 그의 수하들의 범죄행위를 옹호하거나 묵인하지 않는다면 ‘완전히 똑같은 이유’로 김정일정권의 범죄행위에 대해서도 동일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북한인권, 진보-보수와 아무 상관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인권문제, 즉 ‘절대악’의 근원인 김정일정권에 대한 비판이 심지어는 색깔론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반김정일정권 운동의 본질이 극도로 흐려지고 있다. 그것은 북한인권문제에 대해서도 경제정책, 교육정책, 복지정책에 대한 논쟁처럼 그 어떤 상이한 입장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면서, 일종의 패싸움의 대상이 된 것이다.
여기에는 스스로 개혁적, 혹은 좌파적 스펙트럼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김대중 및 노무현 정권의 햇볕정책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김정일정권이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개방’의 대상일 수 있다는 착각 하에 북한인권문제 제기와 햇볕정책이 물과 기름처럼 서로 어울릴 수 없다는 유치한 발상으로 인해 좌파 혹은 진보와 김정일정권의 범죄행위옹호가 뒤섞인 것이다.
그 결과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상이 불가능한 가장 오염된 좌파가 한국에 생겼으며, 친김정일정권을 노골적으로 표방하고 있는 열린우리당이나 민노당과 같은 제도권 정당을 그 어떤 이유에서건 지지하는 수많은 유권자들 역시 자의건 타의건 북한인권문제를 방조, 묵인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타락한 한국진보, 맹성해야
우파와 좌파, 진보와 보수 간에 정치, 경제, 사회의 전 영역에서 서로 논쟁하고 정권을 쟁탈하기 위한 다툼을 벌이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지극히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현상이다. 따라서 이들은 서로 경쟁관계이지만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할 필요도 없고 부정해서도 안된다. 필자 자신도 북한인권문제에 대한 묵인, 방조로 인해 노무현정권 및 좌파, 진보주의 시민단체, 지식인을 비판하면서도 항상 꺼림칙한 것은 마치 좌파, 진보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비쳐질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좌우간의 건전한 대립을 위해서는 국가와 정권의 의미에 대한 최소한의 동질성이 없어서는 안되며, 여기에는 ‘인간성에 대한 범죄’를 용인해서는 안된다는 도덕률도 포함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한국의 좌파, 진보는 이들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도덕성에서 회복할 수 없이 타락하였다. 한국의 좌파가 북한인권문제를 이념논쟁, 색깔론, 미국의 협박론, 신냉전주의, 반통일세력으로 몰아붙이는 이유도, 실은 그들 스스로 이 문제가 자신들에게 얼마나 심각한 도덕적 함축을 갖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의 좌파들은 북한에 대한 조건 없는 지원을 통해 북한인민의 생존에 도움을 줌으로써 북한인권에 기여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북한인권에 대한 방법론적 차이를 강조하는 주장으로서 얼핏 그럴싸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도덕적 원칙중의 하나는 사회의 일부 계층, 시민을 희생시킴으로써 나머지 계층의 생존을 도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순식간에 약육강식의 사회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바로 이런 이유로 때로는 소수의 인질을 구하기 위하여 인질의 수보다 더 많은 경찰이 희생되더라도 인질을 방치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에 직면하고 있는 북한인민을 제외하고 북한인민의 생존에 도움을 줌으로써 북한인권개선에 기여하였다는 주장은 도덕적으로 그 어떤 정당성도 결여된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인권문제로 촉발된 반김정일정권 운동을 좌파와 우파의 이념문제로 본다거나 방법론적인 차이로 보는 것은 그 본질에도 어긋나며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의 타락한 진보가 파놓은 구덩이에 스스로 빠지는 행위일 뿐이다.
김정일정권 성격규정 정확해야
여기서 반김정일정권 운동의 본질을 규정할 필요가 생긴다. 그러기 위해서는 논리적으로 김정일정권의 성격규정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김정일정권의 성격규정에 있어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는 김정권의 본질 파악이 객관적으로 타당해야 하며, 둘째는 그 규정이 좌우의 이념차이에 의해 영향 받아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반김정일정권 운동을 “반북”이라고 칭하는 것은 매우 애매모호한 표현이다. 비록 “반북”에서 “북”이라는 표현은 ‘북한의 정권’을 의미하겠지만, “우리 민족끼리”를 주장하는 남북한의 사이비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북한 인민’을 지칭하는 것으로 호도될 수도 있다.
또 반김정일정권 운동을 “반공”이라 칭하는 것도 이제는 의미가 없어졌다. 현재 김정일정권은 공산주의조차도 제대로 하지 않는, 김영환 <시대정신> 편집위원이 지적한 것처럼 김정일 가계와 몇몇 세습측근들을 중심으로 한 마피아•조폭세력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미국기업연구원(AEI)의 에버슈타트(Eberstadt)는 김정일에게 ‘스탈린식 계획경제(Ordinary Stalinistic Planeconomy)’라도 제대로 하라고 충고한 것이다.
또한 반공주의 자체가 좌우의 이념대립을 의미한다는 점 뿐만 아니라, 요즈음 누구를 “공산주의자” “빨갱이”라고 비난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친김정일”이란 표현도 김정일이 악이라는 판단을 공유할 때만 의미가 있지, 그렇지 않을 경우 단순한 비난조차 되지 않는다. 한국의 대통령과 장관들부터 김정일을 치켜세우고 옹호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마도 “그렇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이냐?”라고 반응할 것이다.
저질민족주의와 파시즘 부역정권
김정일정권의 본질은 파시즘이다.
물론 “수령독재”나 “스탈린식 독재정권”이라는 표현도 김정일정권의 주요 측면을 포착하고 있지만, 전자는 주사파들에 의해 이른바 ‘수령뇌수론’을 통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후자는 ‘스탈린식 공산주의’를 연상시켜, 김정일정권을 그렇고 그런 공산주의 국가 중의 하나로 만들 위험이 농후하고 또 김정일정권의 봉건성을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김정일정권의 본질을 파시즘으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논의와 근거제시가 필요하겠지만, 일단 간략히 요약하자면, 파시즘은 ‘사이비민족주의’ ‘폭력’ ‘대중선동’의 세 기둥을 바탕으로 일어나며, 결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은 경제체제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파시즘은 경제체제에 관한 한 매우 애매한 입장을 취했고 취할 수밖에 없었다.
파시즘은 사이비민족주의를 통해 외부세계를 증오하게 만들어 인민을 고립시켜 통제하고, 무자비한 폭력을 기반으로 정권을 유지하며, 인민 스스로 파시즘적 사고를 확신, 개발하도록 전문적인 대중선동을 하게 된다. 특히 전문적 선동선전은 파시즘을 단순독재와 구분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서, 단순독재는 정권유지에 필요한 군대, 경찰, 언론 등 주요 권력기관을 장악하는 데에 그치지만, 파시즘은 반드시 사회의 각 계층의 자발적 동의를 목표로 한다(80년대 이후 한국 내에 생긴 주사파와 현재 한국사회 전 영역에서 김정일정권을 지지하는 세력은 파시즘의 이런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김정일정권이 위의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고 있음은 췌언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여타 파시스트정권에서는 도저히 보기 힘든 ‘권력세습’과 정권 주변의 ‘세습공신세력’을 감안하면, 김정일정권의 본질은 “봉건세습파시즘”이라는, 참으로 엽기적인 명칭으로 규정되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필자는 반김정일정권 운동의 본질을 반파시즘운동으로 보며, 한국 내에서 김정일파시즘의 만행을 묵인하는 세력은 “파시즘의 방조자 내지는 부역자”들, 그런 정권은 “파시즘의 방조정권 내지는 부역정권”으로 불려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유럽 좌파, 파시즘에 저항 역사 있어
반김정일정권 운동을 반파시즘으로 규정함으로써 우리는 북한인권문제가 좌우의 이념논쟁을 초월하고 있음을 말할 수 있고, 이점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유럽과 남미에서 좌파는 파시즘에 대한 격렬한 저항의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한국의 좌파가 정상적인 좌파, 좌파의 국제적 기준을 만족시키려면, 결코 파시즘을 방조, 묵인하거나 부역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남북정권의 야합적 공조로 남북연방제 등을 기정사실화하고, 이를 비판하는 세력을 “반통일세력”으로 몰아 부칠 경우, 김정일정권과의 ‘통일-반통일’의 경계가 실은 ‘친파시즘-반파시즘’의 경계임을 즉각 주장할 수 있다. 또한 조금이라도 사고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차마 입에도 올릴 수 없는 “우리민족끼리”라는 이 저질민족주의가 실은 파시즘의 기본 전제임을 밝힘으로써 그 퇴행성을 명백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실제로 김정일파시즘의 만행을 ‘우리민족’이라는 이유로 묵인하는 노무현정권이 고이즈미의 야스쿠니참배를 비판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전범 도조 히데키도 고이즈미에게는 바로 ‘우리 민족’ 아닌가?).
독일노동운동의 전통에서 히틀러의 나치독일을 피해 노르웨이로 망명, 저항운동을 벌였던 독일사민당의 정치가 브란트(Willy Brandt)는 1970년 폴란드를 수상 자격으로 방문하였다.
2차대전 당시 바르샤바의 유태인 주거지역(Warschauer Ghetto)에서 저항하다 점령군인 독일군에게 몰살당한 폴란드 유태인들을 기리는 경고비(Mahnmal) 앞에 브란트는 헌화하였다. 잠시 후 아무런 예고 없이 내리는 비로 흥건히 젖은 돌바닥에 브란트는 무릎을 꿇었다. 그는 자신의 조국 독일, 자신의 ‘우리 민족’ 독일인이 폴란드인에게 저지른 만행에 대하여 “단지 화한을 놓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느낌”에서, 굳이 말하자면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심정으로 사과한 것이다. 이 광경을 찍은 한 장의 사진이 폴란드인 뿐 아니라 전세계인을 감동시켰다.
파시즘 방조자들, 브란트 기억할 때
김정일정권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그 이유는 무릇 모든 정권은 언젠가는 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르면 10년, 늦어도 15년이면 김정일파시즘의 붕괴는 결코 단순한 가정이 아니라 현실이 될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김정일은 시간에 쫓기고 있다고 보아도 된다. 또, 같은 이유에서 한국의 김정일파시즘의 방조, 부역자들도 시간에 쫓길 것이다. 남북연방제든, 남북공조든 어떤 부산을 떨겠지만 그것이 이들의 운명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북한의 강제수용소의 문도 열릴 것이고 김정일파시즘의 희생자에 대한 추모가 있을 것이다.
필자는 브란트의 폴란드 방문사진을 보면서 그때가 오면 어느 누가 북한의 절멸수용소의 희생자비 앞에 브란트처럼 무릎을 꿇을 수 있을까 질문해 본다.
“좌, 자유적(links, liberal)”이라고 자신의 가치관을 요약하였던 사회주의자 브란트를 기억하는 한국의 좌파들도 이제 이 질문을 해야 할 때가 됐다.
홍성기/ 아주대 특임교수(철학박사)
홍성기(洪聖基) -서울출생(1956) -경기고, 서울대 독문과 졸업 -뮌헨대 철학석사 -자르브뤼켄대 철학박사(논리학, 동서비교철학) -아주대 특임교수(현) -주요논문 : <용수의 연기설><괴델의 불완정성 정리 비판> 外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