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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자회담 공동성명 발표 이후 한국 정부가 대규모 대북지원 프로젝트를 가시화할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북한이 25일 핵 위협에 대한 ‘억제력 보유’를 강조해 남한 정부의 북핵 접근이 지나친 낙관론에 근거한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북한 당국은 ‘핵 무기 보유’ 공식화 이전 이를 ‘억제력’이라는 표현으로 사용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22일 북핵 타결을 전제한 실질적인 대규모 경제지원 준비에 착수를 지시한 데 이어 이날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는 정상회담 추진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나섰다.
그러나 25일 북한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은 북한의 군대와 인민은 미국의 핵 위협으로부터 나라와 민족의 존엄과 안전을 수호할 수 있는 강력한 자위적 억제력을 마련해 놓은 것을 자랑과 긍지로 여기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각에서는 이행계획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성급한 지원 논의를 가시화 하는 것은 북한의 구체적 핵 폐기 단계로 이행을 유도하지 못하고 말대 말, 행동대 행동 대응 원칙에 어긋난다고 지적한다.
공동성명이 발표된 다음날 바로 북한이 외무성 담화를 통해 ‘선(先) 경수로 제공’을 요구해 북한의 이행 의지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낳기도 했다.
공동성명 발표 직후 환영 일색이었던 국내 여론도 이번 합의문이 참가국간의 의견 차이를 봉합한 수준에 머물렀다는 진단이 나오면서 한국 정부의 협상 태도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고 있다.
◆한국 정부 ‘북 정권 연민의 정’ 보여
서울 모 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국 정부는 핵 개발을 강행한 북한 정권에 스톡홀름 신드롬 현상을 보이고 있다”면서 “이번 4차 6자회담에서 한국은 북한, 중국과 함께 미국을 압박하는 행태를 취했다”고 주장했다.
스톡홀름 신드롬이란 1973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발생한 은행 인질강도 사건 당시 인질로 잡힌 여성들이 인질범에 대해 연민과 동정을 느끼게 된 데서 유래된 것인데, 한국 정부의 북핵 접근이 북한을 이해하고 동정하는 인질들의 심리상태와 유사하다는 설명이다.
한국정부는 그동안 북핵 위기 발생 책임을 미국과 북한에 절반씩 묻는 스탠스를 취해왔다. 북한이 회담장 이탈이나 무리한 요구를 해올 경우에도 단호한 대응보다 북한의 입장을 인정하면서 북한의 협상력만 제고시켜준 꼴이 됐다.
그동안 정부는 6자회담 핵심쟁점에서 북한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
2차 회담까지 지켜온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 폐기 원칙(CVID) 검증가능한 핵 폐기로 변경했다. 고농축 우라늄(HEU) 프로그램도 ‘폐기하라’에서 ‘있으면 폐기를 논의하자’로 후퇴했다. 경수로 제공 논란에서도 결국 북한의 손을 들어줬다.
◆갈수록 더해가는 남북정권 공조
송 차관보는 20일 청와대 만찬에서 6자회담 일화를 소개하며, “제가 항구 얘기를 하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선장은 바람이 아무리 잘 불어도 소용없다’고 하니 김계관 대표는 ‘우리는 같은 배를 탔다’고 화답했고, 회담 마치고 나서 제가 ‘이제는 정말 같은 배를 탔다. 이제 배에서 내리면 물에 빠진다. 중국도 배 타는 데 동참했다’고 말했다”며 남북공조를 과시하기도 했다.
이번 6자회담 최대 수혜자는 여권의 대권주자로 손꼽히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다. 북핵 문제로 한반도 긴장이 연출되면 대북 정책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이 닥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남한 정부는 김정일 위원장의 선의(善意)만을 기대하는 셈이다.
북핵 6자회담이 참가국간 이해관계에 의한 정치 회담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핵 폐기에 집중하기 보다는 위기관리와 파국을 막기 위한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임시방편의 봉합은 결국 사태를 파국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데 위험이 있다.
이미 남한 정권이 김정일과의 공조에 명운을 걸고 있는 이상, 북한과 관계 악화를 무릅쓰면서 정책을 펼치기가 힘들어졌다. 북한 지도부의 협력은 참여정부의 대북 정책과 차기 정권 창출에서 결정적인 변수가 됐다.
최근 북한 관영매체들은 한나라당 집권 저지를 위한 비난전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다. 북한 노동신문은 24일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남북 대결의 역사가 되풀이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노동신문은 24일 ‘반통일 전쟁책동을 일삼는 민족반역세력’이라는 제목의 논설을 통해 “미국의 전쟁 머슴꾼 한나라당이 집권할 경우 북남 대결의 역사가 되풀이되고 종당에는 민족의 머리 위에 핵전쟁의 재난이 들씌워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항간에는 북한이 개성공단 또는 백두산․개성 관광에 대폭 협조하거나, 핵문제 조율을 통해 차기 정권 창출에 개입하려고 할 것으로 보인다는 말이 나돌고 있다.
◆핵 포기 단계로 보는 착시 현상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19일 “6자회담 타결은 중국의 기여와 함께 우리 정부의 중대제안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타결’이란 단어를 써가며 ‘한국 외교의 승리’라고 말했다.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김근식 교수는 한 일간지에 “북핵 타결 우려 보다는 희망을 이야기 하자”는 글을 기고했다. 그는 여기서 북한의 선 경수로 지원 요구를 샅바 싸움에서 승기를 잡기 위한 협상 전술이라고 했다.
여기에 대한 이해는 각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번 북한의 담화가 합의서에서 약속한 빠른 시일 내에 NPT와 IAEA에 복귀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은 분명하다.
북한이 2차 핵 위기 발생 이후 3년 동안 요구한 내용 대부분이 담긴 합의문을 조속히 이행하지 않겠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여전히 북한의 전략이 불투명하지만, 험난한 기로와 신중한 판단이 필요한 북핵 회담에 남한 정부는 때 이른 샴페인을 터트리고 있다.
‘북한은 약자이며, 조건만 주어지면 핵을 포기한다’는 장담할 수 없는 전제에 기초한 남한 정부의 북핵 접근은 국민들의 대북 여론을 왜곡시켜, 북핵에 우호적이고 동맹을 멀리하는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주현 기자 shin@dailynk.com